[빚, 그 5천년의 생얼①] 연재를 시작하며···’질문스케일’ 보면 ‘사람그릇’ 알아

[아시아엔=김영수 국제금융학자] 우문현답이라는 말이 있다. 바보같은 질문에 오히려 현명한 답을 한다는 말일게다.

그러면 ‘대문대답’(大問大答)은? “큰 질문에 큰 답을 한다” 대략 그런 뜻으로 필자가 만든 말이다. “큰 질문을 던지는 자만이 큰 답을 찾을 수 있다”는 말이다. 당연하다. 큰 질문을 던지고 큰 답을 얻고, 다음 큰 질문을 던지고, 그 다음 답을 얻고…그런 과정을 큰 담론, 큰 이바구, 대사상, 대철학, 도통, 통섭 등으로 부를 수 있겠다. 명칭이 뭐든간에, 누구나 그게 뭔지 다 안다.

답이 틀리건 맞건, 그것은 차후 문제다. 일단 던지는 질문의 스케일이 웅대하고 거침이 없어야 한다. 학문을 하건, 정치를 하건, 던지는 질문의 스케일이 일단 커야 한다. 그래야 돼도 크게 되고, 실패해도 후회가 없다.

반면 찌질한 질문을 던지면 찌질한 답만 얻을 수 있다. 당연하다. 그러면 그렇게 살 수밖에 다른 가능성이 없다. 그냥 세상이 개같이 보일 뿐이다. 좀 잔인한 이야기가 될 수도 있겠지만, 그런 ‘개같은 세상’은 사실 개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서식처다. 또, 큰 질문을 던진답시고, 황당한 질문을 던지면 그저 엉뚱한 사람이 될 뿐이다.

황당하지 않으면서 찌질하지도 않기는 쉽지 않다. 그저 튀어보려고 객기스러운 질문을 던질 수도 있다. 오늘도 미움을 받아보려고 던지는 질문도 있다. 그러나 누구든지 큰 질문이 뭔지는 안다.

그런 질문을 던지는 자신을 과시하고 싶어서 던지는 질문들 즉 대답할 필요는 없고, “넌 너무 멋있어!”라고 평을 해주면 금방 해결될 질문들, 그래서 답이 필요없는 질문들도 참 많다. 그건 호르몬 균형의 문제이며, 당뇨로 인한 치매의 초기 증상일 가능성도 높다.

온 인류가 겪는 고통의 근본원인은 뭘까, 그래서 인류가 이 본원적이고 내재적인 고통으로부터 누구나 구원받는 방법은 없을까? 이런 질문들이 큰 질문이다. 답이 뭐든 간에 일단 질문의 스케일이 통쾌무비하다.

점과 점 사이의 가장 짧은 거리는 직선거리? 왜? 그것이 반드시 옳지 않을 수도 있다. 우주의 끝은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면 해가 떠서 지는 것이 아니라, 지구가 도는 것이 아닐까? 시간, 그게 사실은 공간의 한 변수일 뿐이야…이런 것들이 큰 질문이다.

작은 질문들 예를 들지는 말자. 예를 들다가 구차해지기 때문이다. 그냥 보통의 우리들이 실수로 던지다가 대강 쭈그러드는 찌질한 질문들은 맞아도 그만, 안 맞아도 그만이기 때문이다.

내 자신이 늘 무척 찌질하기에 큰 질문을 던지고 큰 답을 하는 사람들을 선망하고 좋아하며 흠모하고 모방해 보려고 늘 시도한다. 폼나 보여서 그렇다.

내가 보기에 큰 질문은 유대인들에게 어느 정도 독점적으로 주어진 민족적 특권인 듯하다. 옛부터 유대인들이 큰 질문을 잘 던진다. 아 큰 질문이건 작은 질문이건 워낙 질문을 많이 던진다. 그러다 보니 큰 질문이 나올 확률이 높을 수밖에 없다.

지금까지 역사상의 큰 질문들 가운데 유대인이 던진 큰 질문들은 민족 구성원 비율로는 설명이 불가능할 정도로 많다. 가정교육이 독특해서 그런가 보다.

유대인들에게 무슨 질문을 하면, 답을 해주는 것이 아니라, 질문자가 했었야 하는(데 하지 않았던) 더 좋은 질문을 알려준다.

그래서 무척 미움을 받는다. 그런데 나는 사실 유대인들의 그런 반응이 참 좋다. 가정교육도 “시험성적이 내렸으니 용돈 줄인다” 이런 식으로 하는 건 아니라고 본다. 자식들이 무슨 질문인가를 하면 답을 해주는 것이 아니라, 무슨 질문을 해야 하는가 그것을 훈련시킨다. 무서운 민족이다.

Free_thinking

지구상에 가장 ‘Free Thinking’ 하는 민족, 자유로운 영혼을 장착한 민족, 그래서 질문의 사이즈에 겁을 먹지 않고 그저 마구 물어버리는 그런 담대한 지성을 가진 민족이 유대인이다. 토라, 미드라쉬, 탈무드 등은 ‘질문하는 법’을 배우는 과정에 등장하는 문건들이다. 성경도 내가 알기로는 ‘욥기’ 이외에는 전부 유대인이 썼다. 그걸 외우고 필사한다. 물론 나는 옳은 접근법은 아니라고 본다. 계속 다음 질문을 던지기 위해 만들어 놓은 질문 유도 문건들이다. 다음 질문으로 나가는 것이 바르게 그 문건들을 읽는 방법이다. 배우려 하면 안 된다. 궁금해질 준비가 돼야 한다.

그것이 쉐마(the Shema)의 기본정신이다. 교회용어 사전에 따르면 “너희는 들으라”는 뜻이다. 신명기 6장 4절의 초두에 있는 말씀으로, 히브리인들의 신앙고백이요 교육지침이 된 말이다. 배우겠다는 것은 내 것으로 만들겠다는 건데, 거기엔 차별적 위계적 폭력적 우주관이 침습할 수밖에 없다.

다른 사람보다 더 배워서 다른 사람보다 더 높아져, 다른 사람보다 더 권력, 즉 폭력을 내 자의적인 컨트롤 아래 두겠다는 거다. 사실, 가장 지식에 반하는 접근법이다. 과거공부, 입시공부, 입사시험, 승진시험 등과 성경이나 고대의 지혜문건들은 그렇게 접근하면 차라리 처음부터 읽지 않는 것이 더 도움 된다.

다시 잠시 유대인들로 이야기를 돌리자. 유대인들의 교육은 ‘질문하는 방법에 관한 질문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다. 아니 질문하는 방법에 관한, 질문하는 방법에 관한 질문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다.

One comment

  1. 저도 이 책을 몇 년째 읽다 말다 그랬어요.
    그래서 포기하고 google author에서 이 책에 대한 Daniel Graeber씨가 하는 강의를 youtube로 먼저들었어요.
    참 대단한 분이지 뭐에요
    이 책도 있고 하고 facebook에서 지인이 modern money theory 소개글도 있고 해서 youtube에서 Randall Wary 교수의
    Modern Money Theory 강의를 듣는데 거기서도 이 책과 Daniel Graeber씨를 언급하더라구요.
    대단한 분에 대단한 책 맞는 것 같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소개해 보려고 한국어판 찾고 있었는데 이 칼럼을 찾았네요
    김영수 박사님 필력도 대단하십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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