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빚, 그 5천년의 생얼⑤] 그레이버 “교활하고 비겁한 학교교육, 청년들 수렁에 빠트려”
[아시아엔=김영수 국제금융학자] 좋다. 내가 무능해서 그렇다 치자. 내가 부모를 잘못 타고 나서 그렇다 치자. 그런데 왜 이 사회가 이 모양이 됐냐? 그게 궁금하다는 거다. 왜, 누구나 다 발명왕이어야하고, 왜 누구나 다 부모를 잘 타고 나야하는 거냐…내가 누구를 해친 것도 아니고, 누구를 착취한 것도 아니고, 우리 부모도 열심히 사셨고, 나도 학교 다닐 적에는 공부를 나름 열심히 했고, 직장생활도 나름 성실히 했건만, 왜 내가 이런 꼴을 당해야 하는가? 이게 뭐 잘못 된 것 아니냐? 일등 학생, 초우량 직원 그들만 살라는 거냐 말이다.
가만히 보면 일등 학생과 초우량 직원이라고 사는 꼴이 별로 낫지도 않다. 자존심 때문에 또는 알려졌다간 손님 떨어질까봐 안 그런 척 하고들 있지만, 의사나 변호사들도 빚을 못 갚아 야단들이다. 그 사람들도 돈 벌겠다고 악을 쓸 수밖에 없다. 필요 없는 치료를 해야 하고 되도 않은 재판을 마구 걸도록 고객을 꼬드겨야 한다. 안 그러면 파산하고, 파산하면 면허가 취소되기 때문이다.
학교란 곳도 그저 말 잘 듣는 것만 가르쳐주는 곳이 아니던가? 누가 누가 더 말 잘 듣는가로 경쟁시키고, 그 경쟁에서 뒤쳐지면 패고 모욕 주고 겁주고 해서, 사람을 무조건 말 잘 듣는 기계로 만들어 놨다. 빚은 무조건 갚아야하는 것으로 전혀 의심도 하지 못하도록 해놓는 등 심리적으로 완전히 노예상태로 사람을 만들어 놓은 것이 아니냐는 말이다. ‘왜?’ 라고 묻지도 못하게, 미안할 필요가 없는데도 미안한 감정이 들도록 세뇌시켜 놓는 곳, 잘못 한 것도 없는데 잘못 했다고 느끼게 프로그램해 놓는 곳, 그게 학교가 아니던가?
조금 더 까놓고 이야기해 보자. 요사이는 많이 줄어들었다고는 하나, 성적이 안 좋으면 매질을 하거나 기합 주는 학교들이 있었다. 그런 학교를 선호하는 부모들도 많았다. 그러나 학생이 성적이 안 좋으면 선생을 패야 하는 거 아닌가? 이발소에 갔는데 잘못 깎으면 손님을 패야 하나 이발사를 패야 하나? 이발사는 면도칼을 들고 있으니 손님을 패도 되는 것인가 말이다. 식당에 갔는데 맛이 없으면 주방장이 잘 못한 것인가, 손님이 잘 못한 것인가? 학교에서 학생이 성적이 좋지 않으면 학교가 잘못 한 것이고, 교사가 잘못 한 거다. 그런데, 왜 애들이 주눅들게 고개 푹 숙이고 반성하는 거냐 말이다.
학교란 곳도, 처음 정직하게 “여기 나와도 결국 노예상태로 빠지게 되는 거야”라고 처음부터 알려주어야 한다. 직장이란 곳도, “여기서 열심히 일해도 결국 노예상태로 빠지게 되는거야”라고 처음부터 알려주어야 하는 거다.
이 사회의 노예적 노동력의 충원을 위해, 그저 뭐든지 내가 잘못했다고 말하는 그런 말 잘 듣는 기계, 무조건 자기가 잘못했다고 말하는 기계 그리고 주말에 시간이 있으면, 더 잘 하는 방법이 뭔가를 가르켜 주는 자기계발서를 읽고 다음 주에는 더 우량기계가 되어보겠다고 부들부들 결심하는 기계, 그런 기계를 만드는 곳이라고 왜 처음부터 이야기하지 않는 거냐 말이다.
이게 다 사실은 권력관계의 현상이다. 권력이 있는 사람들은 빚을 져도 더 당당하다. 미국정부의 빚은 그리스정부 빚의 수천만배에 해당한다. 그런데 왜 미국정부가 그리스정부에 큰소리를 치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재벌들 빚은 도대체 얼마인가? 헤지펀드들은 도대체 빚이 얼마냐? 내 빚의 수억배의 빚을 지고 있지 않는가? 그런데 왜 내가 그 사람들 앞에서 주눅들어 있어야 하는가?
빚? 좋다, 갚기로 하자. 그런데 왜 내가 갚아야 하는 빚의 사이즈가 내가 꾸었던 것의 몇배가 된 것인가? 이건 무슨 조화냐? 있는 사람들이 빌릴 적에 오히려 이자를 더 비싸게 내야하는 것 아니냐 말이다.
이런 질문들 말이다.
예전에는 이런 질문을 던지면, 불에 태워 죽이거나, 교주로 모시거나 둘중의 하나로 결정났다. 더위에 약한 사람이나, 종교적이지 않은 사람은 이런 질문을 하지 않도록 조심했었어야 한다. 자식 중에 이런 질문을 던지는 사람이 있으면 “모난 돌이 정맞아” 하면서, 얼마나 겁을 주어왔던가?
그래도 요사이는 인터넷시대가 되어 이런 질문을 던져도 불에 태워 죽이지도 않고 교주로 모시지도 않는다. 그나마 다행이다. 모가 나도 상당 기간 정을 맞지 않는다.
자, 이런 것이 Graeber가 던지는 첫 질문이다.
이 사람이 왜 ‘Occupy Wallstreet 운동’의 핵심에 들어갔는가, 어느 정도 이해가 될 것이다. 왜 예일대에서 테뉴어를 받지 못했는가도 이해될 것이다.
왜 많은 사람이 이 사람 의견에 통쾌해 하고 후련해 하는지 어느 정도 이해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