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빚, 그 5천년의 생얼⑥] 종교에 대한 이야기는 왜 항상 ‘뜨거운 감자’인가

[아시아엔=김영수 국제금융학자] 빚과 돈, 종교는 그에 관해 뭐라고 말하고 있나?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분명히 밝힐 일이 하나 있다. “오늘 하는 이야기는 내 얘기가 아니다.”

대부분의 경우, 나는 종교에 관해서 어떠한 의견도 밝히지 않는다. 학문과 금융 그리고 철학에 관한 이야기는 자주 하며 내 의견도 종종 밝힌다. 그 분야에 관해서는 뭘 좀 잘못 이야기해도 비난받을 일은 드물다. 싸움도 잘 안 난다.

쿨하게 서로 의견이 다를 수 있으니, ‘껄껄껄’ 이러면서 성숙하게 넘어가기도 한다. 멋있다. 말해서 폼 나고, 관용스럽게 들어줘서 멋있다. 그러나 종교에 관한 이야기는 거의 모든 경우 어떤 이야기를 해도 남는 일이 없다.

여차 하면 두들겨 맞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순교의 일상화를 각오해야 할지도 모른다.

차라리 ‘예수천국, 불신지옥!’을 지하철 속에서 외치면 사람들이 피하지 날 공격하지는 않는다. 엄격한 의미에서 그건 소통이 아니다. 안전거리를 확보하는 거다. 일상의 대화 속에 종교적 가치관을 대화 속에 반영하는 것, 그것이 예수천국을 외치는 것보다 몇 배 더 어렵다. 앞으로 계속 볼 상대를 지근거리 심지어는 생활권 내에 두고 하는 소통행위라서 그렇다. 나의 일상이 걸려있고, 내가 속한 사회 속에서의 나에 대한 평가가 걸려있다. 잘못 하면 약간 미친 사람쯤으로 찍힌다.

종교문제에 관해서는 잘못 이야기했다간 항의데모 정도야 참으면 되고, 참다가 정 기분 나쁘면 나도 그 집 찾아가서 항의데모를 하면 되니 걱정할 것도 없겠다. 그렇지만 걱정스러운 것은 테러가 심심찮게 발생한다는 점이다. 내가 아는 종교 학자들 중에 테러로 돌아가신 분이 2명있다. 그분들이 뭐 특별히 극단적인 이야기를 한 것도 아니다. 학문적으로 충분히 할 수도 있는 이야기, 혹 반대의견을 가진 사람은 반대의견을 학술적으로 표현하면 되는 그런 이야기들을 하던 분들이다. 그런데 오히려 반론은 전혀 없었다. 다만 테러가 있었다. 그래서 그들이 돌아가신 거다.

그 신도들이 ‘성스럽게’ 생각하는 것을 건드려서 그렇다고 나는 생각한다. “거기까지만! 너, 다른 것은 다 건드려도 그건 건들지마”에서 바로 ‘거기’ 그게 ‘성스러운 것’이다. “Set apart”등으로 묘하게 설명하려고들 그러지만, 그건 뭔가 모르는 사람들 이야기다. “거기까지! 너 다른 건 건드려도 그건 건들지마!”에서 ‘거기’ 바로 ‘성스러운 영역’ 즉 ‘성역’에서 멈춰야 한다. 그걸 건드리면 눈알이 돌아가고 뚜이 열리며 곧장 연장을 들게 되는 바로 그것, 그것이 성스러운 거다.

모든 종교는 성스러운 것을 여럿 가지고 있다. ‘터부’는 사실 성스러움의 마일드한 외연이다. 터부는 좀 건드려도 경고성공포 발사 정도로 끝난다. 그러나 성스러운 것은 그렇지 않다. 곧장 ‘무재판 처형’이 실시된다. 계엄 하에 초병에게 독극물을 제공하여 군법재판에 처해지는 것보다 더 심한 범죄라서 그렇다.

한국의 욕설 중에 어머니와 관련한 욕이 많은 것이 지금도 모계전통이 아주 강한 사회이고, 어머니는 절대무비의 성스러운 존재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상대의 가장 성스러운 부분을 외설적으로 공격하는 언어를 구사함으로써 상대에게 심리적으로 폭력을 행사하려는 그 의도가 어머니와 관련한 욕설로 표출되는 것이다.

어떤 종교든 그에 관해서 이야기하다 보면, 아무리 객관적으로 서술하려고 해도, 그 성스러운 것들과 여기저기 필연적으로 접촉하게 된다. 그래서 즉각 무한 폭력적 상황으로 치닫는다.

모든 종교에 관해서는 △무조건적으로 칭찬하고 감탄하고 넘어가거나 △나를 따르는 신도를 규합해서 내 세력을 충분히 구축하고 난 뒤 맘껏 이야기하거나 △아무런 관계도 없는 남의 이야기를 뜬금없는 형식으로 소개해야 한다.

나는 그럴 듯하게 생각하여 뭘 한참 신나게 이야기하다가도, 맞을 것 같으면 즉시 의견을 바꾼다. 그 이상의 존경을 바라지도 않고, 바란다고 한들 줄 사람도 없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오늘 (내가 아니라) 그레이버(Graeber)가 하는 이야기를 들으면, 하여간 많은 사람들이 스캔달리조(앞에서 소개한 성경 속의 ‘실족’이란 뜻의 단어) 당할 것이다.

종교와 인생에 관해서 많은 사람들이 가져온 지금까지의 기존관념과 전혀 맞지 않는 이야기를 몇 개 듣게 될 것이다. 도저히 받아들이기 어려운 이야기도 아마 절반(아니, 거의 다) 정도 될 것이다. 종교를 가진 분들은 굉장히 화를 낼 것이다. 그럴 적에, 다음 문장을 반드시 기억해 주기 바란다. “귀하들의 적(敵)은 내가 아니라, Graeber이다.” 난 단지 조심하자는 차원에서 소개하는 것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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