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15일] 분노한, 그러나 분열한 쿠르드인들
2007년 노무현 대통령 교황 만난 날
2007년 2월15일 밤(한국시각) 당시 노무현(盧武鉉) 대통령은 교황청을 방문해 교황 베네딕토 16세를 25분 동안 면담했다. 북한 핵문제를 비롯한 한반도와 동북아 평화 정착 문제에 대해 의견을 교환했다.
노 대통령은 이날 자리에서 교황이 한반도의 평화와 화해를 지지해준 데 대해 사의를 표명한 뒤 북한에 대한 교황청의 지원을 당부했고, 교황청은 당시 6자회담 합의에 대해 환영을 표하며 지속적인 관심과 지원을 약속했다.
베네딕토 16세는 “북한 핵문제의 위험은 교황청도 충분히 이해하고 있는 큰 우려사항”이라며 “본인은 북한 국민들 중 가장 취약한 계층들이 인도적 지원을 받을 수 있도록 하겠다”고 약속했다. 또 “모든 관련 당사자들이 현재의 긴장요인들을 해결하기 위해 평화적인 방법으로 모든 노력을 기울여줄 것을 촉구한다”면서 “협상을 위험하게 하는 제반 조치들을 삼갈 것을 촉구한다”고 덧붙였다.
베르토네 교황청 국무원장은 남북한 간에도 대화를 통해 상호 이해와 교류를 증진시켜 나가게 되길 기대한다고 밝혔다.
노 대통령은 이날 면담 뒤 가진 동포간담회에서 “협상이 다행이 잘 타결됐지만 속으로는 우리가 다 주더라도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면서 “북한에 다 줘도 핵 문제가 해결되면, 결국은 우리에게 남는 장사가 된다”고 말했다. 노 대통령은 “(북한에) 자꾸만 퍼준다고 비난을 많이 듣는데 미국이 전후에 여러 정책도 펴고, 투자도 하고 했는데 그 중 가장 효과적인 것이 마셜플랜”이라며 “우리도 개성공단을 하고 있는데, (이를 통해)미국의 마셜플랜 이상의 성과를 거둘 수 있다”고 말했다.
한편 남북한은 이날 개성에서 장관급회담 대표 접촉을 갖고 2월27일부터 3월2일까지 평양에서 제20차 장관급회담을 열기로 합의했다. 남북대화에서 이런 초고속 합의가 나온 것은 처음이었다.?
2007년 미 하원 ‘위안부 청문회’…일제만행 드러나
2007년 2월15일 오후(현지시각) 미국 하원 외교위 아시아태평양환경소위는 하원 레이번 빌딩에서 2차 대전 당시 일본군 종군위안부로 강제 동원됐던 할머니들을 출석시킨 가운데 사상 첫 청문회를 개최했다.
미 의회에서 종군위안부 청문회가 열린 것은 처음이었다. 이번 청문회는 특히 일본계 미국인 마이클 혼다(민주) 하원의원이 최근 위안부에 대한 일본 정부의 사과 등을 촉구하는 결의안을 하원에 제출해 열리게 됐다.
이날 청문회에는 한국인과 네덜란드인 할머니 등 3명이 나와 종군위안부로 끌려가게 된 과정, 일본군들로부터 겪은 수모와 강간 등 일제가 저지른 만행을 낱낱이 증언하고 일본 정부의 공식 사과와 역사바로세우기, 위안부 결의안 처리를 위한 미 의회의 역할을 주문했다.
혼다 의원은 “지금 우리가 행동에 나서지 않으면 일본 정부로 하여금 위안부들이 당한 고통에 대한 책임을 시인하도록 할 역사적인 기회를 잃고 말 것”이라며 “일본 정부가 명확하고 분명한 사과를 해야 진정한 화해가 이뤄질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의회내 우파로 알려진 다나 로라바허 의원(공화)은 이날 일본은 결의안이 요구하고 있는 사과 등 조건을 이미 충족했다며 앞선 세대의 잘못으로 일본의 현세대가 처벌받아서는 안될 것이라고 일본측을 두둔, 혼다 의원과 논란을 벌였다.
또 가토 료조 주미 일본 대사는 소위에 서한을 보내 일본은 이미 위안부 문제에 대해 책임을 인정했다면서 “과거를 잊지 않으면서 우리는 앞으로 나아가길 희망한다”고 말했다.
미 국무부는 이날 간단한 성명을 통해 위안부 피해자들에게 위로를 표명했으나 앞서 일본 총리들이 위안부 문제에 대해 행한 언급을 들어 일본정부가 위안부 문제에 “조치를 취해왔다”고 지적했다. 미국은 결의안 채택과 같은 조치가 취해질 경우 미일관계가 악화될 것을 우려, 사실상 일본측을 두둔한 것이다.
일본군 ‘위안부’ 결의안은 2006년 4월 미 하원에 제출돼 9월 하원 국제관계위에 만장일치로 통과됐으나 일본측의 강력한 로비에 밀려 같은 해 12월 미 하원 109대 회기 종료와 함께 본회의에 상정되지 못하고 자동 폐기됐었다.
그러나 다시 상정된 결의안은 기어이 미 하원에서 압도적인 지지로 통과됐다. 미국 하원은 2007년 7월30일 종군위안부 강제동원에 대한 일본 정부의 공식사과를 촉구한 결의안(HR 121)을 만장일치로 채택, 동북아 역사문제의 해결에 역사적인 이정표를 제시했다. 1997년 위안부 결의안이 첫 발의된 이래 처음으로 본회의에 상정돼 10년 만에 일궈낸 개가였다.
이번 종군위안부 결의안은 일본의 최대 우방인 미국의 하원이 동북아 역사문제에 대한 일본의 왜곡을 정면으로 지적했다는 데 큰 의의가 있다. 결의안은 △일본 정부가 역사적 책임을 인정하고 일본 총리가 공식 성명을 통해 사과할 것 △국제사회의 권고에 따라 일본 전후세대에게 교육할 것 등도 요구했다.?
1999년 쿠르드족, 궁지 몰리면 전세계 깨문다
1999년 2월15일(한국시각) 쿠르드노동자당(PKK) 지도자 압둘라 오잘란(당시 50)이 터키 당국에 체포됐다. 유럽 전역은 성난 쿠르드인들로 몸살을 앓고 있었다. 분신자살과 관련 국가 대사관 피습, 외교관 인질극 등 무력시위가 거세졌다. 베를린 주재 이스라엘 영사관측은 쿠르드족이 난입하자 실탄을 발사, 시위대 3명이 즉사했다.
유럽인은 깜짝 놀라 쿠르드족과의 대화 여론이 일기 시작했다. 터키와 적대적인 그리스에서는 오잘란을 체포하는 데 정부가 협조했다는 국민 비난이 빗발치자 외무장관 등 현직 장관 3명이 사임했다.
유사 이래 한 번도 독립 국가를 가져본 적이 없는 쿠르드족의 당시 인구는 2500만 명. 1차 세계대전 뒤 독립 국가를 세우려는 쿠르드족의 시도를 짓밟은 것은 터키 독립의 아버지 케말 파샤였다. 쿠르드족 자체도 문제였다. 출신 지역별로 정치적 이해관계도 달랐다. 터키 출신 쿠르드인들은 오잘란과 그가 이끄는 쿠르드노동자당을 테러리스트라고 규정해 탄압하는 미국과 터키 당국을 증오한다. 터키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주요 동맹국이고, 이라크를 공습하는 미군기들이 터키의 공군 기지에서 발진한다.
또 중앙아시아의 석유를 파이프라인을 통해 카스피 해로 실어 나르기 위해서는 터키를 통과하는 것이 필수이다. 무엇보다 이 지역에서 미국·터키·이스라엘 삼각 동맹은, 중동의 반미 세력과 러시아의 남하에 맞서는 중요한 버팀목이다.
반면 이라크 출신 쿠르드인들은 터키의 쿠르드인들과 이해관계가 다르다. 이들은 비행 금지 구역을 설정해 사담 후세인을 막아 주는 미국과 터키가 고맙기 그지없다. 같은 이라크 출신 쿠르드족끼리도 분열했다. 이라크 북부 지역은 1991년 걸프전 이후 비행 금지 구역이 되면서 사실상 쿠르드 국가가 됐다. 그러나 앙숙 관계인 쿠르드애국연맹(PUK)과 쿠르드민주당(KDP)이 각각 이란·이라크와 손잡고 내전을 벌여 또다시 독립 국가를 건설하는 꿈이 무산됐다. 정치적 박해를 피해 유럽 전역에 망명해 있는 85만 명 가량의 쿠르드인도 정치적 입장이 각양각색이다. 전문가들은 유럽에 있는 쿠르드족 85만 명 가운데 쿠르드노동자당(PKK) 소속은 10%뿐이고, 호전적 인물은 그 가운데서도 일부라고 파악하고 있다.
유럽연합(EU) 가입을 원하는 터키 집권 정의개발당은 쿠르드인 인권 문제 제기에 대비해 쿠르드인 융화 정책을 쓰고 있다. 쿠르드어 사용금지 정책이 유지되고 있지만, 쿠르드어 서적 출판이 합법화됐다.
이라크에서는 쿠르드애국동맹 총재를 지낸 쿠르드인 지도자 잘랄 탈라바니(1933년 출생)가 지난 2005년 이라크 대통령에 올라 현재 집권하고 있다.?
1942년 일본, 싱가포르 점령
1942년 2월15일 일본이 싱가포르를 점령했다. 1826년 영국이 최초로 싱가포르를 식민지로 삼았다. 그 뒤 포르투갈과 네덜란드가 차지했다가 1867년 영국의 직할 식민지로 고착화 된다. 이 무렵 수에즈 운하가 개통되고 말레이 반도의 주석·고무 생산이 증가하면서 크게 번영하기 시작했다.
제1차 세계대전 후에는 영국이 싱가포르에 대규모의 해군기지를 세우면서 동남아시아 내 영국세력의 거점으로 떠올랐다. 그러나 1942년 2월15일 말레이 반도를 침략한 일본은 영국군에게 항복을 받아내고 싱가포르를 점령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싱가포르는 다시 영국에게 점령당했지만 1959년에 자치권을 획득했다. 1963년 말레이시아의 일부가 됐다가 1965년 영국 연방에 속하는 주권국가로 독립했다. 인구의 75%가 중국인이므로 말레이시아 연방의 길이 적절치 않다는 판단에서였다.
싱가포르의 어원은 산스크리트어로 ‘사자의 마을’이라는 뜻. 군사 요충지였음을 짐작케 해준다.
영국연방은 영국 본국과 함께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등 옛날 영국의 식민지였던 53개의 나라로 구성된 국제기구다. 오래된 자치령에 따른 정서적 경제적(교역과 투자 및 동일한 화폐) 동질성, 인구이동, 교육제도, 직업 및 사법제도, 스포츠 등이 영국과 동질성을 필요로 하게 된 것이다. 1950~1970년대에 독립을 승인받은 영국의 피보호국들은 대부분 영국연방 가입을 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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