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터 FTA 발효] 터키, 아랍 민주화의 모델
②터키 근대사
터키전문가인 이희수 한양대 문화인류학과 교수가 지난해 <한국-터키 민주화 세미나>에서 발표한 글을 정리해 싣는다. 터키가 이슬람 국가이면서 어떻게 세속주의 나라가 됐고 민주화 과정을 충실히 이행할 수 있었는지 일목요연하게 설명했다. <편집자주>
한국-터키, 알타이 언어와 문화적 친근성
오랜 남성중심의 사회구조, 혈연이나 지연 같은 가족과 지역주의의 강화, 감성적 성향의 우뇌형 문화, 샤머니즘 정신, 알타이 언어와 문화적 친근성 등 문화적 공통분모와 쿠데타·민주화 투쟁이라는 정치사의 유사성을 통해 터키와 한국은 여러모로 닮았다.
그러나 두 나라는 각기 상이한 정치문화 속에서 내용적으로 서로 다른 민주화의 길을 걸어왔다.
터키의 민주화 투쟁은 크게 세속화(secularism)와 이슬람이라는 두 축의 갈등과 조화의 정반합을 통해 발전해 왔다. 세속화를 지키고자 하는 군부, 사법부, 세속 언론 그룹과 국민의 98%가 무슬림인 상황에서 그들의 의사와 종교문화적 특징을 대변하려는 이슬람 정치세력간의 끊임없는 알력과 충돌은 ▲1960년, 1970년, 1980년 세 차례의 군부 쿠데타와 1998년~2001년 이슬람 정당해산을 통한 무혈 쿠데타 ▲2007년 이슬람 성향의 대통령 후보 압둘라귤의 선출 반대 ▲2011년 2월에 쿠데타 모의 혐의로 발각돼 체포된 전현직 군간부 133명의 수감 ▲에르게네콘 사건을 통해 드러난 군부의 이슬람 성향의 집권세력 전복 음모 기도 등으로 나타났다. 무엇보다 세 번의 군부 쿠데타 모두 주모자들이 개정된 헌법에 따라 대통령에 당선되는 전통을 확립했다.
민주화 과정과 역사를 보면 터키가 한국보다는 훨씬 시기적으로 앞서고 있다. 터키는 이미 1860년대에 오스만제국내의 다양한 종족과 종파, 이해관계를 통합할 사회적 필요성에 따라 오스만 헌법제정 운동이 일어났다. 그리하여 1876년 12월23일 최초의 오스만 헌법이 제정됐다. 이어 총선이 치러지고, 이슬람 역사상 처음으로 1877년 3월 이스탄불에 상원 25명, 하원 120명으로 구성된 제헌의회가 개원했다.
첫 번째 의회가 1877년 6월28일, 두 번째 의회가 1977년 12월13일 각각 소집됐다. 그 후 오스만 제국은 압둘 하미드 2세 재위기(1876~1909)에 1905년 러일전쟁에서의 일본의 승리에 크게 자극받아 헌정회복운동이 일어났고 1906년 페르시아에서의 헌정혁명 성공에 이어 1908년에는 터키에서도 Young Turk(청년투르크)에 의한 헌정 혁명이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청년투르크’ 내부에서조차 민주주의에 대한 확고한 방향과 철학이 없었고 경험 부족으로 헌정혁명은 실패로 끝나 다시 권위주의 정권으로 회귀했다.
물론 7세기 중엽 이슬람의 예언자 무함마드의 사후, 아랍부족대표들로 구성된 전원합의체 방식으로 새 지도자인 칼리프를 선출한 전례가 가장 이상적인 이슬람식 민주주의의 시작이었다. 그러나 이슬람 역사 1400년을 통해 이러한 대의민주주의는 다시 회복되지 못했다. 대부분의 이슬람 국가들이 왕정세습을 선호했고, 20세기 독립 이후에는 다시 군부 쿠데타를 통해 많은 아랍 국가들이 사회주의 권위독재국가로 전략해 버렸다. 중동에서는 터키만이 유일한 예외였다.
민주화 과정 한국보다 앞서···1876년 오스만 헌법 제정
터키가 중동 이슬람 국가들 가운데 유일하게 민주화 과정을 성공할 수 있었던 역사적 배경은 첫째, 터키는 역사적으로 오스만 제국 600년을 통해 한 번도 장기간 외세의 침략이나 지배를 받은 적이 없었고, 1차 세계대전의 패전으로 일시적으로 아나톨리아 반도가 영국과 프랑스 등의 침략을 받았지만 곧바로 독립전쟁을 통해 조국을 회복할 수 있었다. 이 점은 ‘독립=자유’가 거의 동의어였던 20세기의 다른 아랍국가들과 근본적으로 다른 역사적 상황이었다. 자유를 위해 독립을 쟁취했지만 독립의 주체세력들이 권력을 독점하면서 권위주의 독재로 갔던 아랍국가들의 전철을 터키는 피해 갈 수 있었다.
둘째, 터키는 오스만 제국 초기부터 서구와의 오랜 접촉과 문화적 교류를 통해 서구식 제도와 대의 민주주의를 접하고 도입하는데 있어서 결정적 걸림돌이 될 만한 저항감이 약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이런 친서구적 경향과 특수관계는 지금도 터키가 유럽지향정책을 표방하면서 유럽연합 가입을 추진하는 정책으로 이어지고 있다.
셋째, 다른 아랍국가들과는 달리 시장 자본주의를 채택함으로써 급속한 경제성장을 이루고 민주주의 발전에 필수적인 시민사회의 형성과 건강한 중산층의 육성에 성공했다는 것이다.
넷째, 종교와 정치를 분리하는 강력한 세속화 정책을 헌법정신으로 채택함으로써 불필요한 종교적 논쟁을 일찌감치 피해가면서 압축적인 사회개조에 매진할 수 있었다. 물론 이에 따른 많은 부작용이 후일 나타났지만 후속 정권들은 이를 적절히 재해석하고 총체적 삶으로서의 이슬람과 민의를 대표하는 민주주의 가치와의 모순을 조화롭게 절충하는데 성공하여 민주주의 발전을 가속화시켰다.
터키는 1923년 왕정을 폐지하고 공화국이 설립된 이후, 1950년경까지 다당제가 인정되지 않은 상황에서 국부인 아타튀르크 중심의 일당독재 형태가 지속됐다. 그렇지만 여성들의 정치참여, 삼권분립과 공정한 선거, 평화적인 정권교체, 지방자치제도의 도입 같은 민주적 제도와 정치문화가 다른 아랍국가들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일찍부터 정착됐다.
다당제 하에서 처음으로 실시된 1950년 선거에서 민주당이 52%의 득표로 집권함으로써 아드나 멘데레스의 민주적 정권을 창출했다. 그러나 1960년 군부 쿠데타로 아드난 멘데레스는 처형되고 이어 1970년, 1980년의 직접적인 군사 쿠데타와 몇 차례의 간접적인 군부 정치참여로 민주주의의 정신이 심각하게 훼손됐다. 진정한 민주주의는 2002년 에르도안 총리의 정의발전당이 다시 단독 집권함으로써 새로운 시대를 열어 가고 있다.
아랍 국가들의 민주주의 롤모델
최근 아랍민주화 시위로 튀니지, 이집트, 예멘에서 정권붕괴가 이어지고 서구의 군사개입으로 리비아 카다피 정권의 몰락, 시라이 아사드 정권의 위기 등이 이어지고 있다. 정권 붕괴 이후 실시된 총선에서는 튀니지, 이집트 등지에서 온건한 이슬람 정치 조직들이 단연 선두를 달리고 있는 새로운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서구를 등에 업고 독점적 권력을 누려왔던 세속적 군부가 퇴조함과 동시에 급진적 이슬람 정치조직들도 거의 참패를 면하지 못하고 있다. 이는 그동안 권위주의 폭압정권 하에서도 풀뿌리 시민단체로서 국민들의 삶 속에 뿌리를 내리고 국민들의 고통을 덜어준 당연한 결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는 이슬람의 정치화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준 현상으로 평가할 수 있다. 이슬람과 민주주의는 병행할 수 없으며 이슬람의 정치세력화는 발전과 개혁에 장애가 되는 보수적이고 전근대적인 체제라는 고정관념을 깨뜨리는데 중요한 계기가 됐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아랍국가들의 미래 민주화 시스템 구축과정에서 터키 모델이 가장 적합한 제도로 인식하고 있는 경향이 생겨나고 있다. 이슬람과 서구가 별다른 마찰없이 윈원할 수 있는 시스템을 경험한 터키를 롤모델로 삼겠다는 의미이다.
터키는 2010년 9월 성공한 쿠데타 주역들을 처벌할 수 없도록 하는 조항과 반인권적 조항을 폐지하는 헌법개정 국민투표를 통과시킴으로써 군부의 정치개입을 원천적으로 차단하고 진정한 민주주의 길로 한 발 다가섰다.
그러나 터키는 아직도 독립전쟁의 영웅 케말 아타튀르크에 대한 어떠한 비판도 용납되지 않는다. 그에 대한 평가는 여전히 헌법으로 보장된 신성불가침의 영역이다. 터키가 진정한 민주주의로 발전해 가면서 그에 대한 비판과 재인식이 관건으로 남아 있다.
좋은 기사 감사드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