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현찬의 Asian Dream] 지압장군 “역사는 왕복달리기가 아니라네”
[아시아엔=박현찬 <경청> <마중물> 저자] ?“왜 이렇게 퍼져있어? 오늘도 또 왕복달리기 한 거야?” 팀장이 툴툴거린다. 여의도 금융가에서 외환 딜러로 일하고 있는 황 대리는 오전에도, 오후에도 열나게 달렸지만 제대로 수익을 내지 못했다. 그나마 큰 손해를 보지 않고 원점으로 돌아온 것만도 다행이라고 위안 삼는다. “쌀 때 사서 비쌀 때 판다”는 매우 단순한 규칙이지만 아직 초보 딜러인 그로서는 타이밍을 맞추기가 여간 어렵지 않다. 70년대에 대학을 다닌 사람들에게는 왕복달리기에 대한 추억이 남아있다. 당시는 예비고사(지금의 수능시험)에 체력장 점수가 반영되었는데 그 안에 왕복달리기 종목이 있었다. 10m 구간을 왕복으로 두 번 달려서 그 기록을 재는 것으로 순발력이 중요했다는 기억이 남아있다. 하지만 요즘 왕복달리기에 대한 상념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 것은 옛 추억을 반추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직접적으로는 언론매체에서 지치지 않고 끊임없이 정치권의 소식을 전해주고 있는데, 그 모양새가 뭔가 제대로 진척되는 일은 없고 매양 같은 사안이 반복되는 느낌이 들어서다. ‘식물국회’, ‘개점휴업’이라는 비아냥거림도 귀에 진물이 날 정도다.
세월호 특별법만 해도 그렇다. 몇 차례 협상과 합의소식이 들려왔지만 실제로는 해결된 것 없이 같은 일이 반복되고 지지부진이더니, 마침내 여야 합의가 타결되었다고 하는데도 논란이 가라앉기는커녕 오히려 새로운 분란으로 확대되는 상황이다. 그런가 하면 나도 질 수 없다는 듯 구속된 재벌총수들에 대한 사면 논의를 들먹이고 있다. “비리 기업인에 대한 사면은 절대 없을 것”이라던 대통령의 약속은 또 다시 휴지가 될 모양이다. 역시 예전에 지겹도록 보아왔던 장면의 반복이다. 그것만이 아니다. 우리 사회는 전반적으로 과거의 반복에 둔감해져있는지, 삼풍백화점 붕괴사고 이후에도 수 없이 겪었던 생명경시 행태, 관련 공무원의 태만과 이권 추구, 기업의 탐욕과 무책임 등등 지나칠 만큼 경험을 했지만 20년 후에 다시 더욱 증폭된 형태로 반복되어 돌아왔다. 앞으로 달려간다고는 하는데 한참을 달려도 여전히 같은 구간을 왕복하는 중이다. 왕복달리기에서는 10m를 달려가면 바로 돌아서 출발점을 향해 달려야 한다. 아무리 열심히 달려도 끝에는 무서운 그 분이 떡 버티고 있으니 결국 출발점으로 되돌아오는 운명을 벗어나지 못한다. 선수들은 다만 그 안에서 누가 빠르게 달리느냐에 사활을 건다.
국가대표급의 여의도 구락부 멤버들은 거의 목숨을 건 레이스를 펼치고 있지만 신기하게도 그들은 자신들이 ‘달리기’를 하고 있을지언정 ‘왕복달리기’를 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세상에 우리가 왕복달리기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리지 말라”는 식으로. 그래서 더욱 열심히 달린다. 또는 달리는 척 한다. 마키아벨리의 통찰을 빌린다면 “달리는 사람일 필요는 없다. 그러나 달리는 사람처럼 보이지 않으면 안 된다.” 사실은 달리는 것 자체가 목적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저 자신들의 명줄을 쥐고 있는 누군가의 눈에서 벗어나지 않기 위해 그리 기를 쓰고 있는 것일지도. 가만히 제 자리에 서있는 자들에게는 아무도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움직이지 않으면 도태된다. 왜 어디로 달리는 지는 내가 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달려야 살아남을 수 있다고 굳게 믿는다. 마치 ‘벌거벗은 임금’ 우화처럼 진지한 얼굴로 자못 위엄을 부리며 열심히 왕복하며 달린다. 그들 대표선수들이 잔뜩 무게를 잡으며 나라의 온갖 큰일을 재단하는 동안 언론매체들은 그럴듯한 포장을 위해 열을 올린다. 하지만 그들의 행태는 싸게 사서 비싸게 판다는 머니딜러의 게임룰이나, 하루 벌어 하루 먹어야 하는 밑바닥 인생들의 다툼에 비해서도 하나도 나을 게 없다.
내가 살려면 상대를 이겨야 한다. 어떻게든 이익을 남겨야 한다는 노골적인 생활의 법칙이 지배할 뿐이다. 그렇다면 애초에 무엇을 목적으로 대표선수를 하고자 했는가. 그들은 공정하고 인간다운 사회의 구현이나 부국강병을 논한다. 하지만 실제는 자신의 욕망을 만족시키고 쾌락을 누리기 위해서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훨씬 많다. 하지만 그들은 ‘내가 내 몸으로 내가 일해서 내 돈을 모아 내 입으로 내 것을 먹으니 모든 것이 나의 자유’라고 믿는다. 이런 사정으로 여의도나 세종로에서 매일 반복되는 사건은 아무리 어리석고 비열하며 비생산적인 것이라도 천하의 대사(大事)로 선전되고 매일 밤 뉴스를 장식하는데, 그렇게 열심히 왕복달리기를 마치고는 어김없이 이번에도 국민을 위해서 ‘큰 것’을 했다고 떠들며 의기양양 서로가 만족해마지않는 것이다. 따라서 비록 선발된 멤버이기는 해도 그들의 목표는 국위선양이나 선진사회의 구현, 뭐 이런 것들이 아니다. 무엇보다도 그들의 제일 목표는 자신의 자리를 지키는 것이다.
그래서 돈과 조직이 가장 중요하고, 겉으로 내세우는 공공선의 깃발에 어울리지 않게 벤담(J. Bentham)류의 쾌락주의적 개인주의의 인생철학만을 신앙처럼 받든다. 게다가 왕복달리기는 본질적으로 외부에서 틀과 규칙이 주어지고 ‘위에 계신 분의 정치’가 작동하므로 개별 선수들은 내면으로부터 정립되는 자기 기준을 갖기 어렵다. 여의도나 세종로의 구락부도 예외는 아니다. 어느 날 혹시 이러한 장치가 제거된다 해도 그들은 새로운 형태의 ‘위에 계신 분의 정치’를 다시 불러올 가능성이 크다. 자본과 권력의 시스템 그 자체 혹은 ‘위에 계신 분’은 선수들에게 끊임없이 왕복달리기를 요구하고, 그러한 반복은 종내 사회적 메커니즘으로 확장되어 누구도 벗어나기 어려운 구조적 강박의 지경에 이른다. 그리하여 마침내 사람들은 퇴행적인 왕복달리기도, 어두운 과거의 회귀도 불가피한 것으로 받아들이며, 단지 자신의 자유를 무제한으로 구가하는 자기중심주의에 필사적으로 매달리게 된다.
한국언론이 베트남의 지압(Vo N. Giap) 장군을 만났을 때다. 기자는 과거로 회귀되고 있는 사회에 대한 비판을 늘어놓으며 물었다. “역사는 언제나 반복되는가 봅니다.” 그러자 구십 평생을 역사의 현장에서 싸워 온 지압 장군이 기자의 손을 잡으며 이렇게 말해주었다. “젊은이, 역사는 반복되지 않아. 다만 사람들이 오류를 반복하고 있을 뿐이라네.” 국가대표이지만 전혀 그들을 뽑아준 국민들의 의식과는 무관하게 따로 노는, 심지어는 역행하는 ‘왕복달리기 구락부’를 어찌 해야 하나. 더 이상 그들만의 왕복달리기를 보고 싶지 않다면, 우리가 함께 공모하고 있는 자기중심적 자유주의 가치관부터 끊어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