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의 어른’ 둔 베트남의 저력
드높은 자긍심, 실용적 유연성의 원천은?
지난 9월 박근혜 대통령의 베트남 국빈방문 하이라이트는 한류 발상지로 아직도 그 열기가 식지 않은 베트남에서 그들의 전통의상 ‘아오자이’ 패션쇼에 박 대통령이 한복을 입고 깜짝 등장한 장면이었다. 정감어린 한국 여성문화의 진수를 격조와 절제 속에 담아 보여줌으로써?정감(Tinh Cam)의 민족이라고 자긍하는 9000만 베트남 국민의 가슴에 진한 감동을 주었다.
한국과 베트남 두 정상은 미래지향적 공동번영을 위한 실질적 성과물을 공동성명에서 밝혔다. 수교 21년밖에 안 된 두 나라 간 무역과 투자가 이처럼 단기간에 활화산처럼 폭발하고 있는 경우는 유례가 없다. 이미 인도와 인도네시아를 앞질러 한국의 6번째 수출국인 베트남과 한국 간 교역은 지난해 200억 달러를 넘었고 2020년까지 700억 달러를 달성하기로 양국 정상이 합의했다. 양국 간 자유무역협정(FTA)도 내년 중 체결하기로 해 교역확대에 가속도가 붙을 전망이다. 두 나라는 ‘사돈지간’이라 불릴 만큼 5만 명 이상의 베트남 여성이 한국에 시집와서 살고 있다. 한국과 베트남이 지속적인 동반자로 나아가려면 서로를 정확히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다.
첫째, 베트남(한자음 越南)은 어떤 나라인가? 한마디로 아시아에서 한국과 닮은 점이 가장 많은 나라이다. 상고시대 이후 19세기 구미제국에 문호를 개방하기까지 두 나라의 대외관계는 오로지 중국과의 관계가 전부였다. 두 나라 모두 한자를 쓰고 유교문화권에 편입됐다. 특히 베트남은 938년 독립할 때까지 1000여 년 간 중국의 속국이었다. 때문에 과거제, 가부장적 장유유서 등 유교문화가 뿌리내리게 된 것 또한 한국과 다를 바 없었다.
제주도민 표류, 한-베 교류 효시
둘째, 베트남 민족은 자국에 대해 드높은 자긍심을 갖고 있다. 소중화(小中華)사상과 특유의 애국주의 이념을 민족의식 속에 끊임없이 각인해온 결과다. 예컨대 송나라 대군을 괴멸시킨 리 트엉 끼엣, 몽고의 3차에 걸친 공격을 격파한 쩐 흥 다오 장군은 물론 현대 베트남 독립의 아버지 호찌민, 보 응웬 지압 장군까지 모두 문무 겸비한 문장가요 애국주의의 화신들이다. 그들은 백성 위에 군림하기보다 백성을 섬기며 검소한 삶을 실천한 지도자들이다.
베트남 민족의 뿌리 깊은 애국주의는 민족주의와 달리 내향적 혈연관계에서 우러나는 정서적 개념이며 ‘조국’ ‘백성’ ‘동포’에 대한 애착을 의미한다. 이것이 외세의 위협에 맞서 생명을 아낌없이 던지는 집단적 대동단결의 원동력으로 작용했다. 그 결과 20세기 항불, 항미 전쟁이나 1979년 중-월 전쟁 등 세계 최강국을 상대로 한 전쟁에서 일반적 예상을 깨고 모두 승리했다.
지난 10월4일 103세를 일기로 별세한 지압 장군은 필자가 여러 번 회견한 바 있는 전설적 전쟁영웅이다. 하노이 호앙 지에우 거리의 국가요인 관사에서 이례적으로 안방 거실까지 보여주며 환담하는 가운데 짝이 맞는 찻잔이 없을 정도로 검소하게 사는 것에 크게 놀랐다. 특히 중국과 베트남의 국력에 관한 얘기를 하며 “베트남은 마치 에트나 화산 밑에 사는 시실리인에 비유되는 국력 아니냐”고 묻자 장군은 “국력은 평방미터 크기보다 국민의 애국의지와 문화적 전통에 달렸다”고 답했다. 평생 숙적이던 전 미국 국방장관 맥나마라와 수교 후 만남에서 대미승전 요인을 묻는 기자에게 그는 “만약 미국이 베트남 민족의 문화를 잘 알았더라면 베트남전에 참전하지 않았을 것이고 패전의 아픔도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셋째, 베트남 역대 지도자들의 현실주의적 유연성은 나라와 국민을 살렸다. 이는 도가와 유가 사상의 균형을 보여주는, 베트남 지도자 특유의 여성 문화적 의식구조이다. 호찌민이 2차 대전 종전 후 프랑스를 축출키 위해 불-월 협상 과정에서 보여준 유연한 외교가 모범사례 중 하나다. 1986년 6차 당 대회에서 자본주의 시장경제 도입을 주도한 인물이 호찌민의 직계제자로 공산당 보수 이념파 거두였던 쯔엉 찐이었음은 상식으로는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서열 1위 당총비서직을 6개월만에 개혁파에게 양보하고 물러나 공황에 빠진 경제를 구하고 오늘의 ‘도이 모이(쇄신)’를 성공시킨 초석을 놓았다. 대의를 위한 발상의 전환은 유연한 정치가만이 할 수 있다. 국민의 진심어린 존경을 받는 ‘나라의 어른’을 가진 저력 있는 국가가 베트남이다.
넷째, 한-베 교류사를 보면 흥미로운 기록이 여럿 있다. 16세기 중국을 무대로 양국 사신인 지봉 이수광과 풍 칵 코안이 필담과 문장실력을 뽐낸 창화시들이 전래된다. 17세기엔 제주도민들이 베트남에 표류했다가 베트남 조정의 세심한 배려 아래 양국간 최초의 외교문서를 지참해 무사귀환한 사건이 있었다.
조선왕조 숙종실록 15년 2월 신해조(辛亥條)와 정동유의 만필주영편에 상세히 기록된 바에 따르면 숙종 정묘(1687년)년 제주도민 24명이 추자도 근해에서 큰바람을 만나 35일 동안 표류하다 안남국(安南國) 호이 안(Hoi An)에 표착했다. 요즘 관광지로 유명한 베트남 중부 해안지역이다. 24명 중 뱃머리에 있다가 순라선에서 건네준 물을 급히 마신 3인은 혼절 후 사망하고 21명이 상륙해 인근 섬 마을에서 10개월을 유하며 현지 풍속을 체험한다. 이들 중 5명이 어느 날 왕궁이 있는 수도에 초대받아 하사금과 식량을 받고 고향에 돌아가고 싶다고 눈물로 호소하자 국왕이 청나라 상선의 선주를 소개해 주었다. 이들은 선주와 1인당 쌀 30석으로 갚을 것을 약조한 뒤 보고하니 왕이 600냥의 보상금과 국서를 주며 무사귀국 시켜주었다. 선주에게는 다시 돌아올 때 조선의 문서를 받아오면 후히 보상할 것이라고 했다. 이들은 1688년 8월7일 출범해 청나라 영파부를 거쳐 그해 12월16일 제주도에 귀환하는 드라마 같은 일이 벌어졌다.
이들이 받아온 국서(移文)는 표류 경과, 환대, 귀환 조치, 조선 당국의 사후조치와 회신요청 등 완벽한 형식과 내용을 담은 외교문서로서 손색이 없다. 당시 일본 선박이 크기와 시설이 열악해 안전귀환을 보장할 수 없어 수차 궁리 끝에 청나라 상선을 용선했다는 내용과 표류민을 지칭할 때 조선을 안남민과 한 몸처럼 친밀한 우방이라고 언급한 것을 보면 당시 안남국 조정의 인후한 덕치와 인도주의 그리고 외교수준을 높이 평가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