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압 장군 “어두운 과거 떨치고 상생의 미래로 나가자”

작고한 ‘베트남 통일 영웅’ 보 응웬 지압 장군

“한국과 베트남은 공통점이 많다. 두 나라는 이민족의 침략을 받았지만 어떤 경우에도 근본을 잊지 않고 살아왔다. 이런 공통점을 살려 서로 굳게 손잡고 나가자. 영원한 원수는 없다. 현재가 중요하다. 과거에 매여 있으면 발전이 없다.”

‘베트남 독립과 통일의 아버지’로 불리는 보 응웬 지압(武元甲) 장군이 생전에 전한 메시지다. 1997년 10월24일 아시아문화교류재단 설립자인 박승준(76·전 한국외대 재단 전무) 명예이사장이 한-베트남 문화교류 활성화를 위해 호치민시에 한국문화원을 설립할 당시 지압 장군을 예방한 자리에서였다. 그는 160cm 남짓 작은 키에 별 네 개가 달린 견장이 붙은 베트남 특유의 옅은 국방색 군복을 입고 필자 일행을 맞았다.

적국인 미국 언론이 ‘20세기 최고 명장’으로 칭송했던 보 응웬 지압 장군이 지난 10월4일 별세했다. 향년 102세.

2차 대전 종전 후 베트남을 계속 식민지로 지배하려 했던 프랑스는 1953년 3월 북부 국경도시 디엔비엔푸에서 벌어진 베트민(Vien Minh, 베트남 독립동맹)과의 결전에서 3000명이 죽고 1만2000명이 포로로 잡히는 참패를 당했다.

강대국과의 전쟁 모두 승리로 이끌어

그 승리의 주역이 바로 지압 장군이었다. 프랑스군이 물러간 뒤 미군과의 전쟁에서 1966년 음력설에 맞춰 남베트남 주요도시 관공서를 기습공격했다. 이른바 ‘구정공세’다. 이 전투에서 베트민은 3만5000명이 전사하는 큰 손실을 입었으나, TV를 통해 미 대사관이 일시 점령을 당하는 모습을 전 세계에 보여줬다. 당시 200여 명의 미국 기자들이 목격한 전쟁의 참상은 베트남전에 대한 미국인들의 생각을 뒤집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북위 17도를 남북 군사경계선으로 분단된 지 22년만인 1976년 7월2일 두 베트남은 마침내 통일을 이뤘다. 1979년 초 중국과의 국경분쟁에서 8만5000명의 병력을 동원한 중국과 전쟁을 치렀다. 중국군은 여기서 3만여 명의 전사자를 내고 철수했다. 이 역시 지압 장군의 철저한 대비 덕분이었다.

이 같이 20세기 인도차이나에서 강대국의 식민지 전쟁을 모두 승리로 이끌었던 지압 장군은 아이러니컬하게 군사훈련을 한번도 받아본 적이 없는 지식인이다. 하노이대학을 졸업하고 교사, 언론인 경력을 가졌을 뿐이다. 그는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프랑스·미국·중국 같은 강대국을 이길 수 있었던 비결에 대해 “나는 세 가지를 하지 않았다. 적들이 원하는 시간, 싸우고 싶어 하는 장소, 그들이 예상한 방법으로 싸우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른바 ‘3불(不) 전략’이다.

“베트남 전쟁에 한국이 참전해 베트남 남쪽에서 악행을 저질렀다. 우리는 한국군의 잔학성을 기억하고 있다. 한국정부와 국민들은 이에 대해 분명히 알아야 한다. 한국의 대통령들이 베트남을 방문해 이런 사실을 인정하는듯한 태도를 취하는 것을 봤다. 참으로 잘한 일이다. 지금 한국과 베트남의 경제협력이 증진되고 있다. 과거는 지울 수 없지만 미래를 향해 함께 나아가야 한다.”

박승준 이사장은 베트남 종전 30주년인 2005년 지압 장군이 언론 인터뷰에서 한 말을 깊이 되새겨야 한다고 강조했다. 지압 장군은 디엔비엔푸 기념관 설립에 관심을 쏟으면서 사이공 해방 기념일, 호치민 생일 등 중요 행사에 참석하는 것 외 차분한 노년을 보내다 근래 하노이로 거처를 옮겨 병원생활을 해왔다.

보 응웬 지압 장군의 장례식은 10월12일 국장으로 치러졌다. 추도식과 매장식은 10월13일 그의 고향인 중부 꽝빈성에서 엄수됐다.

당박하(鄧碧河·87) 여사는 프랑스와의 전쟁 중 첫 부인을 잃은 지압 장군과 21세 때 결혼해 평생 내조했다. 베트남 통일 이후 박사학위를 받은 그는 하노이대학 역사학과 교수와 베트남 국립사회인문과학연구원 부원장을 역임했다. 1999년과 2001년 두 차례 한국을 방문했다. 2001년 5월에는 청와대를 방문해 대통령 부인 이희호 여사와 만나 “베트남과 한국 여성계 교류를 늘리자”고 제안하기도 했다. 이후 지압 장군과 함께 양국 교류협력을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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