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잔혹사···’비더마이어 시대’서 나치·소련군의 ‘부녀자 성폭행’까지
[아시아엔=김중겸 전 인터폴 부총재] 비엔나에서 진격 멈춘 적군(Red Army). “이 넋 나간 동지들아. 베를린에 미군보다 먼저 들어가란 말이다.” 스탈린이 호통을 쳤다.
서둘러 진입했다. 그때가 1945년 4월 21일. 폐허와 벽돌 더미 속에서 독일 여성을 보이는 족족 겁탈했다. 열살 소녀를 부모 눈앞에서 능욕했다. 예순 다섯 어머니와 스물두 살 딸을 나란히 눕혀 놓았다. 소대원이 윤간했다. 10만명이 넘는 여성이 당했다.
“나치는 소련 점령지마다 위안소를 차리지 않았느냐. 누가 위안부였는가?” 열등인간이라 한 소련 여성은 나의 어머니였다. 여동생이었다.
독일 국방군은 마을마다 뒤져 강간했다. 그런 다음 죽였다. 우리는 너희들처럼 죽이지는 않는다. 성기와 유방 칼질하기는 한다. 지휘관과 정치장교는 모른 척했다.
용케 덜 무너진 집에 있던 모녀는 딸을 꼭꼭 숨겼다. 어머니는 당했다. 그나마 내 집 있어서 내 딸은 안전했다고 믿었다. 죽을 때까지. 하지만 딸은 들켰다. 온전치 못했다. 어머니에게 끝내 숨기고 살았다.
상하이 1942년
상하이는 여권 없이 상륙하는 세계에서 오직 하나의 도시였다. 물론 비자없이 가능했다. 살인하고 사기 친 도망자의 은신처, 추방당한 자의 거주지, 스파이의 천국이었다. 나치 피해서 온 유태인이 안주할 땅이었다.
나치는 있었지만 힘쓰지 못했다. 중국이 패하고 일본군이 진주했다. 나치가 어깨 폈다. 유태인은 무국적 난민이다. 격리해 달라고 졸라댔다. 게토(ghetto)가 만들어졌다. 2㎢에 1만8천명이 입소했다.
게토의 근대판 효시는 미국이다. 증가하는 백인들에게 요긴한 땅, 인디언이 이미 살고 있었다. 이들을 어디로 보내야 하는데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보호구역이다. 농사와 목축이 불가능한 황무지 그게 게토의 원형이다.
헤브라이어 교실을 만들어 아이들을 가르쳤다. 신문과 잡지도 간행했다. 벼룩시장도 열었다. 그래 봐야 임시인생(temporary life). 죽지 않으면 언젠가는 나가야 한다. 내 집에 간다는 희망으로 살았다.
부다페스트 1944년
6월21일 한밤중에 갑자기 내 집에서 쫓겨났다. 엉겁결에 옷가지나 들고 나왔다. 22만명에 달했다. 동네마다 집합시켰다. 열 지어 줄을 맞췄다. 나치의 구령에 따라서 걸어갔다.
게토, 약 2천채로 1914년에 지었다. 유태인 건축가 작품이다. 딱 30년 후 그곳에서 그도 사망했다. 그렇게 쓰일 줄 꿈엔들 생각했겠나. 한 집에 대략 25명이 수용됐다. 몇 달 지나 그나마 적응할 만해졌다. 그해 12월, 느닷없이 감시병들이 외쳤다. “이송이다! 이송! 어서 움직여!”
나중에 소문만 나돌았다. 8지구 사람들은 안전가옥(protected house)으로 갔다. 모두 살해됐다. 나치에게는 안전조치였던 셈이다. 7만명은 오스트리아로 이송되고 2만5천명은 아우슈비츠에 재수용됐으며 2만명은 다뉴브강 제방에서 총살됐다고 간간히 소식이 들려왔다. 몇이나 살아남았을까? 아무도 정확하게는 모른다.
창문에 노란 별이 붙어있었다. 아이들은 그래서 Yellow Star House라 불렀다. 전쟁이 끝나고 예전에 살던 내 집에 유태인 아닌 이가 살고 있었다. 내 집 들어가 살기 위해 홍역을 치러야 했다.
Biedermeier Zeit
1815년 나폴레옹이 몰락해 세인트헬레나로 유배 갔다. 유럽왕국들은 1789년 프랑스 혁명 전 정치사회체제로 회귀하려 했다. 왕과 추기경과 귀족의 세상으로 가는 보수반동이다.
그러나 자유 평등 공화는 주류 이념이었다. 무산계급 프롤레타리아의 각성도 만만치 않았다. 부르주아 세력은 확장 중이었다. 왕권을 인정하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민주사상의 탄압과 검열을 가혹하게 했다. 아울러 정치에 대한 관심을 다른 방향으로 돌렸다. 어디로? 바로 집이었다.
‘내 집’ 관념은 이 시대의 산물이다. 편안한 내 집, 현관이 있고 거실이 있고 부부침실이 있고 아이들 방이 있는 내 집. 일하는 곳과 사는 곳이 떨어져 있는 직주분리(職住分離)의 내 집이었다.
물론 먹고 살만한 계급, 말 많은 계층에 대한 대책이었다. 제 목소리 낼 힘없는 하층민은 제외됐다. 그들은 여전히 다락방이나 간이숙박소 침대 하나에 그대로 놔두었다.
이 정책을 펼친 시기가 비더마이어 시대(Biedermeier Zeit)다. 1815년부터 1848년까지다. 1848년에는 카를 마르크스의 공산당선언이 나왔다. 혁명도 발발해 33년간 유지된 반동정치는 종말을 고했다.
피아노와 바이올린
오스트리아 재상 메테르니히가 말했다. “나처럼 남자아이는 바이올린을 켜게 하시오. 따님은 당연히 피아노를 치고.”
베토벤이 악성으로 추앙받았다. 이 시기였다. 요한 스트라우스도 이름을 날렸다. 이런 문화 환경 속에서 어린이 음악교육이 붐 탔다. 오스트리아를 거쳐 독일에서 유행했다.
미국에선 19세기 중반 금광을 발견해 골드러시와 더불어 어린이 음악교습이 확산됐다. 집안에 돈이 돌자 일어난 현상이다.
일본은 어땠나? 2차 세계대전 후 음악학원과 피아노 교실이 성황을 이루었다. 역시 여유가 만들어 낸 문화다.
그러면 한국은? 보릿고개 없어지면서 시작했다. 특히 80년대 웬만하면 피아노나 바이올린을 배우게 했다. 집에 피아노를 들여 놓고, 거리엔 바이엘 교본이나 바이올린 들고 다니는 어린아이들이 눈에 띄었다. 콩쿠르도 많았다.
“어른이라고 해서 뭐 정치에 관심 가질 필요 있겠소. 마이 홈에서 가족과 함께 쾌적하게 지내시오. 따님 경연대회 응원도 가시고 말이오. 비더마이어요.”
비더마이어? 이 시대를 잘 표현한 시인의 이름이다. 정치에 무관심하고 내 집, 내 가족 소중히 여기는 보통시민들의 문화를 이르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