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중겸 칼럼] 뉴욕경찰 200년, ‘이런 일 저런 사람’

[아시아엔=김중겸 전 인터폴 부총재] 민주당 지역 하부조직 Tammany Hall에 아는 사람 소개를 받고 간다.

“경찰관 취직 좀 시켜 주세요.”

“그래? 누가 보냈어?”

“윌리엄 모모씨입니다.”

“알았어. 300달러 가져 왔지? 이리 내.”

연줄(connection)과 당파가 채용의 열쇠다.

이어 경찰서에서 배지와 경찰봉을 받는다. “자네 근무 순찰구역(beat)는 13지구일세. 거기 지역담당 경사( sergeant)에게 신고해. 바로 가!”

임용 끝, 근무 시작이다. 1800년대 후반 뉴욕시경 모습이다.

“어디 아프다고? 소학교도 안 나왔다고? 이름 쓸 줄 알지? 그럼 됐어.”

범죄 전과 있다고? 그런 게 하등 장애가 되지 않았다. 유니폼 같은 건 없었다. 교육도 없었다. 대도시는 어디나 다 이런 상태였다.

1880년 공장 근로자 연봉이 400달러. 순경은 900달러. 경찰관이 되었다는 건 그 경찰관이 속한 인종과 종교집단에게 출세의 증거였다. 그 도시 인구구성에서 상당한 비율을 점유한 증좌였다. 정치와 행정 파워의 분점이 가능해졌음을 의미했다.

차별하고 경멸하고

인종과 종교 간 갈등은 심했다. 식민지시대 이민자의 후손은 터 잡고 가질 거 다 쥔 먼저 정착한 토박이의 텃세에 눌려지내야 했다.

늦게 바다 건너온 아일랜드인과 독일인을 괄시했다. “우리가 피땀 흘려 건설한 미국이다. 니들이 뒤늦게 와서 다 먹어 치우려 하다니. 안 돼지, 안 되구 말구.”

독일계 이민은 Cleveland, Cincinnati, Milwaukee, St. Louis로 몰렸다. 경찰관 채용이 늘었다. 앵글로 색슨과 갈등이 고조됐다.

아일랜드 출신 바니 맥기니스킨(Barney McGinniskin)이 최초로 보스턴 경찰관이 됐다. 1851년이다. 온 시민이 소동을 피웠다. “아일랜드 출신이 우리 시 경찰관 되다니. 말세다, 말세.”

남북전쟁이 끝나고 뉴욕 72번가와 센트럴 파크 웨스트가 교차하는 네거리. 시경 사상 첫 아프리카계 경찰관이 등장했다. 새뮤얼 배틀(Samuel Battle)이 거기서 교통정리를 했다.

관광버스가 꼭 들리는 곳이 됐다. 한쪽에 잠시 정차한 후 가이드가 유색인 경찰(colored policeman)에 대하여 설명했다. 동네 백인 청소년들이 오가며 외쳐댔다. “저기 검둥이 경관 좀 봐라.”

1991년 이후 범죄는 줄어드는데

마약수요 감소가 큰 원인이다. 자연히 마약 밀수밀매자의 살인과 폭력행위-마약사용자의 범행도 같은 추세다. 1970년대와 1980년대 합법낙태 범위확대도 한 요인이다. 원하지 않는 출산과 나이 어리고 가난한 싱글맘이 줄어들고 이는 곧 범죄 감소로 이어졌다.

기술발전도 한 몫했다. 비디오게임은 청소년을 길거리로부터 집안으로 데려갔다. 밖에서 나쁜 짓 할 짬이 없다. 카메라폰, 이거 잘못하다간 찍힌다. 범죄자로 하여금 범죄 실행을 재고하게 만들었다.

오바마 효과 즉 흑인 대통령이 미국사회에서 가능했다. 사라져가던 아메리칸 드림이 소생하고 흑인사회에 희망을 선물했다.

10대 흑인 청소년들은 “노력하면 되는구나. 불량배 너 저리 가라. 공부하자”고 맘을 바꿔먹었다. 학력테스트 점수도 향상됐다.

2014년 은행강도도 4347건(이 중 여성 8%)으로 전년도보다 줄었다. 18세 미만 실종은 90초에 한 명꼴로 79만7500건. 115명을 제외하고는 귀가했다. 부모와 자녀 사이를 수시로 이어주는 핸드폰 덕분이다.

에이전트나 짭새들은 말썽부리고

마약단속국(Drug Enforcement Administration) 국장이 2015년 4월 돌연 사임했다. 콜롬비아 마약 카르텔 소탕하러 에이전트 카르텔이 돈 댄 섹스파티에서 놀아난 탓이다.

2012년 불상사의 재현이다. 콜롬비아 정상회담의 오바마 경호팀(Secret Service) 요원 몇이서 매춘부 불러 재미 봤다. 남미 그 동네는 미국 정부 에이전트 무덤으로 기피지역이다.

경찰은 경찰대로 곤혹스럽다. 2015년 4월 남성이 연행 중 척추가 부러져 사망했다. 경찰 밴을 타고 이동했다. 그 안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도망가는 50대는 뒤에서 여덟 발이나 쏴 죽였다.

2014년엔 다섯이나 죽였다. 장난감 총 가지고 노는 열두 살 남자아이를 쐈다. 상점 털고 도망가는 열여섯 살 소년은 뒤에서 쐈다. 노숙자를 아무 혐의 없이 두 경찰관이 사살했다.

경찰이 뒤에서 쏴서야

자동차 검문 시 손들고 차에서 내리려는 운전자를 죽였다. 호주머니에서 총 꺼내려는 줄 알았다고 변명했다. 천식환자가 수갑 차기를 거부하자 목을 졸라 질식사시켰다.

권총 사격만은 일찌감치 가르쳤다. 남북전쟁 끝나자 많은 무기가 시중으로 흘러들었다. 총기사용 범죄도 증가했다. 경찰도 비로소 무장하기 시작했다. 교육도 필요해졌다.

뉴욕경찰 사격훈련소는 1895년 개교했다. 교습 요점은 셋. ①선량한 시민과 범죄 용의자 구별 훈련 ②등 뒤에서나 막다른 골목에서 쏘지 않기 ③안전사고 예방.

등 뒤를 보이지 말라는 말이 있기는 하다. 마피아를 비롯한 범죄자는 뒤에서 쏘기 때문이다. 경찰이 굳이 그렇게까지 쏴야 하는지? 흑인이라서 끝까지 추격해 쏜 건가? 불가해산 백인 의식구조다.

마피아 본거지서 등 맞아 숨진 이탈리아 출신 경찰관

조셉 페트로시노는 뉴욕시경 소속 경위로 마피아 살인사건 수사반장이었다. 현안 사건 해결을 위해 마피아 본거지 이탈리아 시실리 섬에 출장 왔다.

묵고 있던 호텔을 나와 큰 길로 걸어갔다. 오른쪽으로 접어들자 몇명이 따라 붙었다. 1907년 4월12일 밤 8시45분 총성 네 발이 울렸다. 페트로시노는 그 자리에서 죽었다.

그는 최초로 채용된 이탈리아 이민 경찰관 중 한 사람이었다. 25년 근무한 베테랑 형사로 해외 파견근무 중 순직한 최초 뉴욕경찰이기도 하다.

뉴욕 전당포 장악한 윌리엄 벨

순찰 경찰관이 근무 중 담배 피우는 게 예사였다. 담배 씹은 침을 거침없이 내뱉었다. 도난품이나 유실물을 찾으려면 사례해야 했다. 단속도 좀 쥐어주어야 움직였다.

윌리엄 벨은 1850년대 그런 경찰관답지 않았다. 형사 일에 열중했다. 뉴욕 시내 전당포란 전당포는 다 장악했다. 도둑놈은 훔친 걸 팔거나 전당잡혀야 현찰을 만진다. 물건 팔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다 전당포 오게 돼 있다. 발품 부지런히 팔았다. 누가 뭘 전당 잡혔다. 어디서 언제 훔친 거다. 수중에 정보 다 모였다. 성과는 말 할 거 있나.

도둑놈과 소매치기가 형님으로 모셨다. 개과천선도 많이 시켰다. 성공률은 저조했다. 먹고 살 게 있어야 손을 씻을 수 있지 않은가? 시 당국과 시의원들에게 복지행정을 역설했다.

어느 날 다니엘 웹스터를 만나게 됐다. 연방하원 및 상원 의원과 국무장관을 지냈다. 연금문제로 집에서 뉴욕까지 170km를 걸어 왔다 한다. 손자가 곁에 있었다.

청장에게 얘기했다. 철도회사 사장에게 무임승차 편의를 부탁했다. 퇴(退) 자만 찍혔다. 여객마차 서기에게 얘기했다. 흔쾌히 OK 받아냈다. 벨 형사가 남긴 그날 일기는 이랬다. “있는 자들의 가슴은 벼룩만큼이나 크더라.”(as big as a louse)

찰스 웹의? 애듯한 사랑, 뉴욕에 어머니기념공원으로 남아

찰스 웹 50세. 뉴욕 부동산 중개업자로 마흔 살 독신녀 거트룻 고만을 알게 됐다. 둘 다 미혼으로 8년을 교제해 1922년 말 결혼했다.

1923년 9월27일 부인이 독감으로 죽었다. 함께 산 지 10개월, 주치의는 남편의 부인 병 간호를 막았다. 친척들과 친구들은 독살이라 주장했다. 부검 결과 의혹이 해소됐다. 사인은 폐렴으로 치료가 부적절했다. 의사 잘못이었다.

유산 반환소송을 냈다. 1925년 웹의 승소로 매듭지어졌다. 남은 재산은 부동산 포함 63만 달러. 그는 의사와 그들을 용서했다.

부인은 생전에 어머니 기념공원을 만들고 싶다고 했다. 바로 착수해 남긴 부동산 중 30만 달러 상당의 맨해튼 좋은 곳을 골랐다. 2만8000 달러를 들여 놀이터도 만들었다. 역시 아내의 생각이었다. 시설유지기금 5만 달러를 시에 맡겼다.

브로드웨이에서 와즈워스로 이어진 언덕에 조성됐다. 남편이 헌정하고 아내가 엄마에게 바친 공원이다. 사랑했지만 떠나간 사랑은 이렇듯 애틋하다.

 

Leave a Repl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