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팔선생의 고금인생] 日육사 사조직이 2차대전 불러왔다
[아시아엔=김중겸 칼럼니스트/이실학회 창립회장] 일본군은 1894년 청일전쟁에서 승리하고 1904년 러일전쟁에서도 이기고도 30년 가까이 힘을 쓰지 못했다. 1931년 9월 18일. 중국 봉천 근처 류타오후(柳條湖) 남만주철도가 폭파됐다. 일본 관동군이 자작극이었다. 중국군 소행으로 역선전하며 봉천을 점령했다. 바로 만주사변이다.
만주사변 발발 원인은? 1929년 세계공황 탓이라고들 흔히 말한다. 직장을 잃고 노동자와 농민은 정처 없이 떠돌아 다녔다. 먹고 살기 위해 좁은 섬을 벗어나 만주와 몽고로 향했다. 일본공황 타개책이었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더 깊은 원인이 있었다. 만주사변은 6년 후 1937년 중국침략의 발판이 되고 10년 후 1941년 진주만기습으로 이어졌다. 1930년대와 40년대의 전쟁의 뿌리에는 1921년 10월27일 일본 육사 16기 출신 소령 4명이 독일 남부 온천지 바덴바덴 스테파니호텔에서 만났다. 이튿날 17기 소령이 합류했다. 10년 후 만주사변 막후 인물로 2차 세계대전 설계자들이다.
1920년대 일본은 다이쇼(大正) 민주주의시대였다. 여성과 노동자 권리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았다. 일본사회 최대의 관료조직으로 막강한 전력을 보유한 군인들 눈에 비친 세상은 어지럽기만 했다. 열강과 견줘도 손색이 없었다. 거의 한 세대에 걸쳐 전쟁이 없었으며 정치권은 허구한 날 정쟁만 하고 군인은 멸시당했다. 바덴바덴에 모인 육사 출신 소령 넷은 ①16기 나까다 데츠잔(永田鐵山, 37세); 스위스 주재 무관으로 1935년 소장 때 암살 ②16기 오바타 토시로(小畑敏四郞, 37세); 러시아 주재 무관으로 군부 내 암투로 1936년 중장 예편 조치 ③16기 오카무라 야스지(岡村寧次, 37); 참모본부 소속으로 출장 중 참석해 대장으로 예편, 전범혐의 무죄 ④17기 도조 히데키(東條英機, 37세); 참모본부 소속으로 독일 주재 무관으로 참석, 전후 A급 전범으로 교수형.
16기 세 사람은 삼총사(삼바가라스 三羽烏)로 불렸다. 단순히 육사 16기가 아니라 육군전체의 삼바가라스였다. 나까다는 육사 수석졸업에 육군대학 2등 졸업으로 장래 육군대신 감으로 꼽혔다. 도조는 젊은 시절 가미소리(剃刀 면도칼) 별명을 가졌으며 육군 참모총장과 내무-외무-문교-상공-군수-육군 대신과 수상을 지냈다.
이들 네명은 밤 새워 토론했다. 결론은 세 가지 육군개혁 곧 ‘바덴바덴 맹약’이었다. ①완고한 군 상층부가 문제다. 메이지 유신을 성공시킨 주역이었다는 미명 아래 사쓰마-조슈 군벌 (薩長軍閥)이 50년 넘게 군 요직을 장악하고 있다. 삿조(薩長) 출신 아닌 사람에게는 위로 올라가는 길이 막혀 있다. 군벌 제거. 인사를 쇄신해야 한다. ②군정 개혁이 시급하다. 육군 장비가 낙후돼 있다. 17년 전 러시와의 전쟁 때 장비 그대로다. 예산을 확보해서 최신예 장비를 구비해야 한다. ③국가동원태세가 필요하다. 유럽과 달리 일본은 군과 국민이 괴리되어 있다. 이를 극복해서 국가동원태세를 확립해야 한다.
1921년 바덴바덴 맹약의 주인공 네명은 같은 연령대 동지를 규합했다. 16, 17기를 중심으로 15기 선배와 18기 후배를 영입했다. 11명이 도쿄 시부야의 프랑스 레스토랑 이엽정(二葉亭)에서 만났다. 모임 이름은 소바가이(雙葉會). 나중에 후타바가이(二葉會)로 바꿨다. 이들은 특히 인사개혁에 집중했다. 어떻게 해야 육군 상층부를 장악하는가가 주제였다. 후타바가이의 후배 21~24기 모임이 있었다. 1927년 11월의 어느 목요일 18명이 모였다. 처음엔 무메이카이(無名會)라 했다가 모쿠요카이(木曜會)로 변경했다. 간사는 육사 22기 스즈키 테이이찌(鈴木貞一)로 도조의 심복 3奸4愚 중 3간의 한 명이다. 사복 부서에서만 근무해 별명이 신사복 입은 군인이었다. 41년 미국과의 전쟁을 주장한 한 마디로 A급 전범이다.
목요회는 국방전략과 군 장비를 연구해 ‘미일 전쟁론’이 대두됐다. 일-미가 항공전으로 승부를 가리는 세계 최종전쟁이다. 여기서 이기려면 중국과 인도차이나를 지배해야 한다, 그래야 20~30년간 전쟁 지속이 가능하다, 선행조치로 만주와 몽고를 지배해야 한다고 의견이 모아졌다. 만몽영유론(滿蒙領有論)이 전략으로 채택됐다.
二葉회의 16기 나까다와 17기 도조는 木曜會 멤버이기도 했다. 후배들로부터 두 모임을 합치자는 얘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목요회는 1929년 4월 12회 모임을 끝으로 이엽회와 통합했다. 1929년 5월 19일 “하루 저녁을 살더라도 일본제국을 위해서!”란 뜻의 잇세기카이(一夕會)로 다시 뭉쳤다. 육사 14기~25기 41명. 30, 40대 중반 육군 엘리트 소령에서 대령으로 전원 육군대학 출신이었다. 주류 파벌 삿조(薩長閥)가 타파의 대상이었다. 이엽회는 일본육군의 인사구조를 연구했다. 육군 참모총장과 육군대신의 경력을 조사했다. 그 결과 대령 때 육군성 군사과장, 중장 때 육군성 군무국장을 거쳤다는 점이었다. 이들은 우선 영관인사를 담당하는 육군성 인사국 보임과장 자리를 차지하기로 했다. 8년이 걸렸다. 1929년 8월 육군 보임과장에 바덴바덴 맹약의 네 주인공 중 한 사람 오카무라 야스지 대령이 선임되는데 성공했다.
1930년 8월 정기인사때는 보임과장 오카무라의 노력 덕분에 바덴바덴의 네 주인공 중 두 사람이 또 입성했다. 16기 나까다 데츠잔 대령이 육군성 군사과장에, 17기 도조 히데키 대령이 육군 참모본부 편제동원과장에 임명됐다.
보임과장, 군사과장, 동원편제과장으로 발판을 마련한 일석회는 이제 중앙에 포진하기 시작했다. 만주사변 2개월 전인 1931년 8월. 육군성-육군 참모본부-육군 교육총감부의 요직 과장으로 구성된 육군 중앙 정례 중요과장 회의 멤버 7명 중 5명이 일석회 회원이었다. 전략 담당 군사과장, 영관인사권을 쥔 인사과장, 민간인과 물자를 동원하는 편제동원과장, 유럽과 미국의 정세를 관리하는 구미과장, 교육을 관장하는 제2과장 등.
봉천 특무기관장은 16기 도이하라 겐지 대령. 고급 참모는 16기 이타가키 세이지로 대령. 작전 참모는 21기 이시와라 칸지 중령이 각각 배치됐다. 이들이 만주사변을 일으켰다. 도이하라와 이타가키는 A급 전범으로 나중에 교수형에 처해진다. 이시와라는 대미전쟁론 주장자였다. 도조를 상등병이라 부른 괘씸죄로 후방 교토 사단장 좌천된 후 미국과 전쟁 전에 제대 당하는 덕분에 전범혐의는 무죄 판결을 받았다.
1921년 바덴바덴에 모인 소령 4명은 1929년 영관 장교 41명의 일석회로 커졌다. 1931년 이후 전쟁에서 일부는 중앙 계획자로 일부는 일선 실행자로 활약했다. 이엽회와 목요회를 합쳐 만든 일석회는 지론인 만몽영유론을 통해 대미 최종 전쟁론을 그대로 실천했다. 하지만 그들이 구상한 군국주의 일본의 최후는 바로 1945년 8월 15일 패전이었다A급 전범 중 교수형 7명. 이 가운데 육사출신은 6명으로 6명 중 일석회가 4명이었다. 종신금고는 16명. 육사출신은 9명. 일석회는 1명이었다. 전범 도조 히데키의 아버지 도조 히데노리는 육군대학 1기 수석 졸업과 동시에 육군대학 교관과 참모본부 전사편찬부장을 거쳐 보병 3여단장으로 러일전쟁에 참전했다. 전투에서의 실패와 항명을 이유로 여단장 직에서 해임돼 중장으로 명예 진급 후 바로 예비역에 편입됐다.
그는 전사(戰史)의 제1인자라는 평가를 받았다. 일본군인 최초의 전술이론서 <산기슭의 먼지>(戰術麓의 塵)를 집필하고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