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병돈 칼럼] 로켓포 메고 북한군과 싸운 딘 소장

6·25참전 미 지상군 선발대의 선전…한국 국민들 용기 북돋아

북한의 기습남침 3일 만에 수도 서울을 빼앗긴 국군은 한강 방어선과 그 뒤의 시흥지구 방어전에서도 밀려, 지연전을 벌이는 급박한 상황을 맞았다. 7월1일 미 지상군의 부산 도착 소식은 라디오방송으로 한반도 전역에 퍼져나갔다. 이미 3~4일 전 미 해·공군과 영국 해군이 참전하여 단숨에 제공권과 제해권을 장악했지만, 미 지상군의 참전은 실의에 빠진 우리 국민과 당황한 국군장병에게 희망과 사기를 잃지 않게 해줬다. 이는 동시에 소련 및 중공(현 중화인민공화국) 당국과 북한 수뇌부에 미국을 비롯한 세계 자유진영은 더 이상 동아시아의 적화(공산화)를 용납하지 않겠다는 분명한 메시지를 전한 것이기도 하다.

미 지상군의 신속한 부산 도착은 일본에 주둔한 맥아더(Douglas Mac Arthur) 사령부의 출동명령을 받은 제24보병사단장 딘(William F. Dean) 소장이, 우선 선발대로 예하 제21연대 제1대대로, 1개 포대(포병 중대)를 포함한 특수임무부대(Task Force)를 편성하여 부산으로 공수하고, 본대(사단)는 해로로 부산에 상륙하도록 하여 이루어진 것이었다.

첫 교전 스미스부대원들 3분의1 가까이 희생

이렇게 하여 부산에 공수되어 온 증강된 대대규모의 특수임무부대는 그 이튿날(7월2일) 아침 8시 대전에 도착하였다. 사단장 딘 소장은 이 부대를 가능한 한 멀리 북상시켜 오산 북방 죽미령(竹美嶺)에 투입하고, 후속하여 북상하는 예하 제34연대를 안성·평택 지역에 배치하기로 했다. 이에 따라 대대장 스미스(Charles B. Smith) 중령은 5일 새벽 3시 부대를 그곳에 이동시켜 예하 중대들과 지원 포대를 배치함으로써 새벽 5시 540명(보병406명+포병134명)의 스미스 특수임무부대가 비를 맞으며 전투태세에 돌입하였다.

동이 훤하게 트인 오전 7시35분 수원 남쪽에 적 전차(T34) 8대가 나타난 것이 관측되었다. 수원을 점령한 북한군 제4사단이 전차부대를 선두로 하여 남하하기 시작한 것이다.

오전 8시16분. 6·25참전 미군 포병의 초탄이 발사되었다. 그러나 적 전차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계속 남하해 오고 있었다. 보병진지 600m 전방에 접근했을 때 미 보병의 대전차화기인 구경 75mm 무반동총의 첫 탄이 선두전차에 명중하고 이어서 보병의 박격포탄 등 많은 포탄이 집중되었으며 도로변에 배치한 보병 대전차화기 구경 2.36인치 로켓포탄 22발이 적 전차 후면에 집중되었지만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다만 포대를 향해 달려오는 적전차들을 구경 105mm 곡사포로 직접조준 사격(곡사가 아닌 직사)하여 선두전차 2대를 파괴하였다. 그러나 계속 공격해 오는 적 전차에 대한 포사격은 더 이상 할 수 없었다. 선발대로 특수임무부대에 편성된 이 포대에는 105mm 곡사포 6문이 있었으나 포탄은 겨우 6발 밖에 없었다.
오전 11시 적 병력이 ‘종대 대형’으로 밀려오고 있었다. 적 제4사단 예하 제16연대와 18연대였다. 소련제 T34전차를 앞세운 2개 연대가 공격하고 스미스 특수임무부대(대대)가 방어하는, 보병들 간의 치열한 공방전이 계속되면서 우세한 적이 스미스 부대에 대한 포위망을 압축해 들어왔다. 스미스 중령은 중과부적(衆寡不敵)임을 알고 철수명령을 내렸다.

미군과 북한군의 첫 교전에서, 스미스 특수임무부대는 부대원 540명 중 150명이 전사하고 장교 5명, 사병 26명이 실종되었으며 많은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보병화기로는 구경 4.2인치 박격포 2문과 75mm무반동총 2정 등의 공용화기와 다수의 소화기를 잃었다. 포병도 105mm 곡사포를 비롯한 장비 대부분을 잃었다. 적은 전사자 42명과 부상자 85명을 내고 전차 4대를 잃었다.

북한에 끌려가 3년간 포로수용소 생활

그 후 사단장 딘 소장은 용감하고 유능한 마틴(Robert R. Martin) 대령을 제34연대장에 임명하여 천안을 방어하도록 했다. 연대장 마틴 대령은 그날(7일) 저녁 적 제4사단의 공격을 받고 지연전을 하며 천안에서 부대를 철수시켰다. 이튿날(8일) 그는 다시 부대를 이끌고 천안으로 돌아와 적을 공격했다. 연대장 자신도 2.36인치 로켓포를 어깨에 메고 직접 적 전차와 대결했다. 그러나 그의 로켓탄은 적 전차를 파괴하지 못한 채 전차의 반격을 받아 전사하고 말았다.

예하 제21연대와 34연대의 오산~평택~천안지역에서의 방어전을 지켜본 사단장 딘 소장은 사단 사령부가 위치한 대전으로 돌아가 대전지역 방어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7월19일. 적은 항공폭격 및 포격과 함께 제3 및 4사단을 투입하여 대전 포위공격을 시작하며 전차연대를 투입하여 시가전을 벌였다. 때마침 적의 T34전차를 파괴할 수 있는, 보병용 구경 3.5인치 로켓포가 처음으로 미군에 보급되어 보병들이 과감하게 적 전차와 맞서 싸울 수 있었다.

사단장도 직접 이 신형 로켓포를 어깨에 메고 적전차를 공격하여 파괴해 보임으로써 장병들의 사기를 크게 올려주었다. 아침부터 시작된 전투에서 많은 병력을 잃고 예하 지휘관들과 연락도 두절된 사단장은 이튿날 비로소 사단이 포위되었다는 사실을 알고는 (밤에 야음을 이용한) 철수를 결심했다. 부대는 와해된 상태였다.
딘 사단장은 그렇게 적에게 포위된 상황에서 홀로 여러 날을 굶고 헤매다가 적에게 포로가 되고 말았다. 그 후 북한으로 끌려가 3년간 포로수용소 생활을 하다가 정전과 함께 돌아왔다. 북한의 6·25남침 이틀 만에 미 해·공군이 참전하고 6일 만에 미 지상군 선발대가 한반도에 상륙한 후 계속하여 여러 보병사단들이 참전한 것은 세계 전쟁사에서 보기 드문 신속한 조치였다. 이는 바로 9개월 전에 모택동(毛澤東)의 중국공산군이 중국대륙을 석권함으로써 거대한 중국이 공산화된 것에 상당한 위기의식을 갖게 된 미국 트루먼 대통령이 한국과 일본이 적화되는 것은 막아야겠다고 결단한데 따른 것이다.
그런데 그때 신속히 투입된 일본 주둔 미군 보병사단들은 전투태세가 전혀 갖추어지지 않은 부대였다. 그들은 제2차 세계대전 중 태평양을 석권하고 일본 본토에 가까운 오키나와에 상륙해서는 악착같이 저항하는 일본군과 처절한 싸움을 계속하다가 1945년 8월15일 일본의 항복 뉴스를 들었다. 이 후 그들은 지옥의 불구덩이에서 나와 일약 극락에 들어섰다.
전쟁의 잿더미와 굶주림에 허덕이는 패전국 일본에서 점령군 미군 장병들은 달러($)라는 무기를 사용하며 무소불위(無所不爲)의 환락을 누리고 있었다. 무려 5년간 환락에 취해있는 이들의 심신은 풀어질 대로 풀어져 전투원이라고 하기에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그러한 이들을 북한의 6·25남침이 급거 지옥의 불속으로 불러들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단시일에 전장에 적응하여 강한 군대의 모습을 보여 주었다. 이는 고급장교인 연대장과 장군인 사단장이 보병용 로켓포를 어깨에 메고 직접 적전차를 공격해 보이는 등, 그 이전 어느 세계대전에서도 볼 수 없었던 헌신적이고도 뛰어난 리더십에 힘입은 것이다. 이들에게 경의와 감사를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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