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병돈 칼럼] 군은 사기를 먹고 산다
6·25 때 미 장성 아들 35명 전사 ‘노블레스 오블리제’
요즘 군인들의 사기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들린다. 남북이 대치하고 있는 상황에서 국방의 일선을 담당하고 있는 군인들의 사기 저하는 매우 걱정스런 일이다. 사기 떨어진 군대가 싸워 이길 수 없기 때문이다. 왜 사기가 떨어질까? 사기를 올릴 길은 없을까?
오래된 얘기지만, 어느 부대 내무반에서 전우의 생일을 축하해 준다면서 병사들이 주머니를 털어 술을 사다가 건빵을 안주 삼아 마시고 손뼉 치며 떠들썩하게 노래하는 소리를 들은 중대장이 희색이 만면하여 “우리 중대원들 사기가 높다”고 말하는 것을 들은 일이 있다. 전장의 지휘관이 부하들에게 회식을 베풀고 공격명령을 내리면 그 부대는 연전연승할 것인가? 그건 진정한 의미의 사기가 아니다. 회식 후 술기운이 사라지면 그들은 바로 일상으로 돌아갈 것이다. “빗발치듯 쏟아지는 적탄 앞에 돌진하는 것은 그들이 적보다 강해서가 아니라 그들의 상관이 ‘우리가 적보다 강하다’고 믿게 만들기 때문”이라는 명언이 있다.
필자가 특전사령관 때,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특수임무를 맡은 팀이 있었다. 특수방탄복을 입고 상대에게 실탄을 쏘며 하는 훈련인데, 팀원들이 두려움에 떨며 머뭇거렸다. 이때 “나를 향해 사격하라”며 내가 나섰다. 이후 팀원들은 아무런 주저함도 없이 혹독한 훈련을 성공적으로 완수했다.
전장에서 장병들의 공통적인 심리는 “무섭다”는 것과 “살아남고 싶다”는 것이다. 자연스런 현상이다. 상관(지휘관)은 부하들에게 눈 부릅뜨고 “살아남는 길은 오직 나의 명령에 따라 적을 격파하는 것뿐이며 나는 적보다 강한 지휘관, 싸워 이기는 지휘관이다”라고 강조해야 한다.
군의 성패는 오로지 지휘관에 달려
지휘관은 (적보다도) 무섭고 유능해야 한다. 지휘관의 무능은 죄악이다. 패전은 부대의 궤멸, 국가의 패망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부하의 인권은 안중에도 없다는 말인가? 그렇지 않다. 생명의 위험을 무릅써야 하는 전장에서 장병들의 인권은 ‘살아남는 것’이고 ‘그들의 생명을 귀중히 여겨 희생을 최소화하면서 승리의 기쁨을 맛보게 하는 것’이다. 그럴 때 비로소 그리도 무서운 상관이 사실은 자신을 친자식이나 형제처럼 생각하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6·25전쟁 당시 미군은 13만7250명의 전사상자를 냈다. 그들 중 ‘장군의 아들’ 142명이 참전해 35명의 사망자를 냈다. 유엔군 지상작전을 총지휘하던 미8군사령관 제임스 밴플리트 장군의 아들 밴플리트 2세 공군중위는 조종사로 출격해 실종됐다. 정전회담 당시 유엔군사령관이던 마크 클라크 장군의 아들 마크 빌 클라크 육군대위도 금화지구 전투에서 부상해 전역 후 사망했다. 적군이었지만 마오쩌둥 주석의 아들 마오안잉(毛岸英)도 지원군으로 북한에 나왔다가 미 공군기 폭격으로 전사했다. 마오쩌둥은 아들 시신을 북한에 그대로 남겨두도록 했다.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이 국왕이 되기 전 세계대전에 참전한 일화 등 선진국에는 ‘노블레스 오블리제’를 실천한 상류사회, 지도층의 사례가 많다. 국민은 이런 지도자를 사랑하고 정부를 신뢰한다. 이럴 때 군의 사기는 자연히 오르게 된다.
군에서 ‘사기는 군대의 생명’이라고까지 일컬어진다. 사기는 전적으로 지휘관의 지휘 통솔 능력에 의해 좌우된다. 군 교범에 “부대의 성패에 대해서는 오로지 지휘관만이 책임진다”고 강조한 대목은 깊이 음미할 필요가 있다. 사기와 지휘관, 두 단어는 결코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어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