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보도] 1985년 2.12총선, 육군 20사단과 수기사에서 무슨 일이…
1985년 2월 12일 제 12대 국회의원 선거 군부재자 투표에서 육군 2개 사단부대가 사병들에게 ‘완전’ 자유투표를 허용한 것으로 밝혀졌다. 이에 통상 99%를 웃돌던 군부대의 여당 지지율이 75~84% 이하로 떨어져 해당 지휘관들이 인사 불이익을 받았다.
이같은 일은 군 부대 투표 역사상 유례없는 것으로 당시 청와대와 안기부 등 권력기관에서는 일종의 반란으로 여길 정도였다. 특히 이들 부대는 이른바 충정부대로 당시 전두환 대통령의 신임이 두터운 장군들이 사단장을 맡고 있었다.
이들 부대는 경기도 양평 지역의 20사단과 수도기계화사단(수기사)이었다. 당시 20사단장을 맡은 민병돈(89·육사 15기) 예비역 중장은 11일 “선거 1주일 전쯤 인접 수기사의 김진영 사단장과 팔당댐 인근 강둑에서 만나 ‘사병들이 투표권을 자유롭게 행사하도록 보장하자’고 말한 후 함께 결행했다”고 밝혔다.
당시 민병돈 사단장은 군부대 사전투표 직전 사단 간부들에게 “사병들이 특정후보를 지지하도록 유도하거나 압력을 넣는 것은 헌법상 기본권 침해로 명백한 불법”이라며 “상부나 외부의 어떤 압력에도 굴하지 말라”고 지시했다. 이에 20사단과 수기사에서는 2만2000명 남짓 장병들이 자유의사에 따라 투표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들 두 사단에서는 여당 지지율이 타부대에 비해 15~25% 이상 낮은 것으로 나타났다.
2.12총선에서 20사단의 경우 야당표가 25%, 수기사에선 16% 가량 나온 것으로 나타났다. 당시까지는 군부대 투표 종결 후 군내 보안부대에서 투표함을 사전 개봉, 투표결과를 파악해 권력 상층부에 보고해왔다. 자유당 정부 이후 2.12총선까지 군부대 투표는 부대장의 사전 교육과 보안부대의 투표소 입회 등으로 여당 지지율은 99%에 이르곤 했다.
민병돈, 김진영 두 사람은 이후 인사에서 불이익조치를 받았다. 민병돈 소장은 1985년 6월 군인사에서 준장 보직인 육본 정보참모부 차장에 김 소장은 이듬해 7월 육군3사관학교장(경북 영천)으로 각각 좌천됐다. 또 20사단 보안부대장 역시 전주 35사단 보안부대장으로 보직 변경됐다.
한편 당시 신생 신민당의 돌풍을 가져온 2.12총선 결과 전체 276석(지역구 184석, 비례대표 92석) 가운데 △민정당 148석(35.25%) △신민당 67석(29.26%) △민한당 35석(19.68%) △국민당 20석(9.16%) △무소속 4석(3.25%) △신정당 1석(1.43%) △신민주당 1석(0.56%) 등으로 나타났다.
이와 관련해 민병돈 장군은 2016년 1월 18일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의 ‘현대한국 구술사 연구사업단’과의 면담에서 이같은 사실을 밝힌 바 있다. 이는 <구술녹취문-민병돈>으로 편집·발간됐다.
다음은 관련 몇 대목이다.
“사단장 끝 무렵 2.12선거가 있었다. 김영삼, 김대중씨 등이 묶여 있다가 나와서 출마도 하고 당을 새로 만들어 회오리바람을 일으켰다. 그런데 정권에서 예의 부정선거 병이 또 일어나기 시작했다. 투표를 하는데 여당을 지지하라고 했다. 예전처럼 선거교육을 하는 거였다. 그건 선거교육이 아니라 여당 PR 하고 여당 찍으라는 내용이다. 내가 거부했다….’과거에도 우리 군이 이런 잘못을 저질렀는데 이게 언제까지 계속될 거냐. 내가 대통령을 잘 안다. 대통령 뜻이 절대 아니다. 이건 밑에 있는 아첨꾼이 대통령한테 자기 성과를 보여주기 위해 하는 거다’ 생각하고 거부했다. 야단이 났다. 충정부대인 우리 20사단에서 팔당 건너가면 수도기계화사단이 있다. 사단장인 후배 김진영 장군한테 연락해 팔당댐 콘크리트 댐 위에서 아무도 모르게 두 사단장이 만났다. 내가 ‘보안사령관이 별 하나 더 붙여 야전군사령관 나가고 출세하고 싶어서 이런 부끄러운 일을 서슴치 않고 있다. 나는 거부했다. 우리 부대는 공명선거한다. 절대로 부정선거 안된다’ 그랬더니 김진영 장군도 ‘옳은 말이다’ 하며 약속했다. 거기도 충정부대다. 수도권의 기계화사단과 20기계화사단 두 사단장이 거부한 거다. 둘다 대통령 신임 받는 사람들이고, 둘다 충정부대고, 그 지휘관들이 여당 지지해주도록 애들 교육시키는 게 아니라, 그걸 하겠다고 하는 것도 못 하게 지시를 했다. 보안사령부 우리 부대 담당이 내 밑의 여단장, 대대장들한테 가서 압력을 가하는 거였다. 그거 견디기 어렵다. 여단장 대대장들이 전화로 얘기하면 감청을 하니까, 사단장인 나한테 쫓아와서 ‘이거 어떡합니까’ ‘압력 못 견디겠습니다’ 하더라. 그래서 내가 ‘자네들 그쪽 지시가 더 중요하냐? 내 지시가 더 중요하냐? 난 너희 직속 지휘관이다. 외부 또는 상부에서 어떤 지시가 있더라도 내 입을 통하지 않은 지시를 네가 받으면 안 된다. 상부 지시도 반드시 내 입을 통해 내려가야 한다. 내 말 안 듣고 협조해주면 나는 너희를 명령불복종으로 재판에 회부하겠다’고 했다. 그때 사단장이 군법회의 설치와 결재권을 갖고 있었다….그렇게 해서 우리 부대와 수기사는 선거교육 안 하고 공명선거를 했다.”
민병돈 장군은 11일 당시 ‘반란’과 관련해 “나는 소대장 때인 1960년 이른바 3.15 부정선거 때도 소대원들에게 자유투표를 하도록 했다”며 “그건 자유투표는 군인도 국민의 한 사람으로 신성한 권리이며, 이를 보장해주는 것은 군 상급자로서 당연한 책무”라고 했다.
그는 1960년 3월 제25사단 71연대 1대대 4중대 1기관총 소대장이었다며 “대다수 병사가 무학(無學)이었지만, ‘투표는 민주국가 국민으로서 누구도 침해할 수 없는 신성한 권리다. 찍고 싶은 후보에게 맘대로 투표하기 바란다’고 말하자 환호하던 기억이 어제 일 같다”고 했다.
한편 군 부재자 투표는 1992년 3월 24일 14대 총선을 앞두고 3월 22일 9사단 28연대 2대대 소속 이지문 중위가 당시 군부재자 부정투표를 폭로하고, 잇따라 공군방공포사령부 등에서 부정 투표가 드러나면서 그해 12월 제 14대 대통령선거 때부터 영외투표를 도입하는 등 개선되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