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병돈 칼럼] 1910년 3월26일, 안중근 참모중장 순국하다
[아시아엔=민병돈 전 육사교장] 안중근 대한의군 참모중장의 하얼빈역 거사 직후 러시아 측으로부터 그의 신병을 인수한 현지 일본총영사관은 그를 여순 지방법원에서 재판받도록 조처했다.
안중근 의사는 “나는 나라를 위하여 생각하고 있던 일을 결행한 것이다. 대한의군 참모중장으로서 독립전쟁을 하면서 이토를 죽였는데 여순 일본법원에서 재판 받는 것은 잘못된 일이다”라고 주장하며 이토를 처단해 마땅한 15가지 죄목을 밝혔다.
1. 대한제국 민황후를 시해한 죄
2. 대한제국 황제를 폐위시킨 죄
3. 5조약과 7조약을 강제로 체결한 죄
4. 무고한 한국인을 학살한 죄
5. 정권을 강제로 빼앗은 죄
6. 철도, 광산과 산림, 천택을 강제로 사용한 죄
7. 제일은행권 지폐를 강제로 사용한 죄
8. 군대를 해산시킨 죄
9. 교육을 방해한 죄
10. 한국인의 외국유학을 금지한 죄
11. 교과서를 압수하여 불태워 버린 죄
12. 한국인이 일본인의 보호를 받고자 한다고 세계를 속인 죄
13. 현재 한국과 일본 사이에 싸움이 그치지 않아 살육이 끊이지 않는데도 한국이 무사한 것처럼 (일본)천황을 속인 죄
14. 동양평화를 파괴한 죄
15. 일본천황의 아버지인 태황제를 시해한 죄
법정은 방청객과 변호사, 그리고 여러 나라에서 달려온 기자들로 인산인해를 이룬 가운데 일본인 검사 미조부치가 안중근의 정연한 논리에 고전하자 일방적으로 방청객 수를 230명으로 제한하고 변호인도 일본인 관선변호사 2명으로 결정했다. 그나마도 이후 공판은 방청객들을 내보내고 비공개로 진행했다. 결과는 보지 않아도 능히 짐작할 만한 것이었다. 재판은 2월2일과 8일, 12일에 이어 14일에 선고공판이 열렸다. 판사가 사형을 선고하자 안중근은 “일본 형법에는 사형 이상의 형벌은 없는가?”라며 비웃었다. 참으로 놀랍고 당당한 모습이었다. 이후 그는 항소하지 않고 자서전 <안응칠 역사>와 그가 주창한 ‘동양평화론’을 글로 쓰기 시작하며 이 글의 완성을 위하여 예정된 사형집행일을 보름 정도 연기해 줄 것을 요청했다. 법원장은 이를 받아들였다.
그러면서도 법원장 등 일본 관리들은 안중근에게 그가 이토를 처단한 것은 일본의 정책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었다고 말하고 상급법원에 항소할 것을 끈질기게 설득했지만 안중근은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그의 어머니도 두 동생편에 그가 마지막 길에 입고 갈 옷을 지어 보내며 “목숨을 구걸하지 말아라, 다음에 하늘나라에서 만나자”며 “그렇게 하는 것이 어미에게 효도하는 것”이라고 일러 주었다. 이를 알게 된 일본의 언론은 “그 어머니에 그 아들(是母是子)”이라며 놀라워했다.
안중근 재판과정에서 수감생활에 이르는 일련의 과정에서 그를 알게 된 일본관리들, 예컨대 재판장과 감옥의 간수들은 안중근을 존경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판장이 약속한 형 집행 15일 연기는 지켜지지 않고 기어이 3월26일에 집행되고 말았다. 재판에서 형 집행까지 모두 일본의 뜻에 따라 진행된 것이다.
안중근 대한의군 참모중장은 대한제국 침탈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고 1910년 3월26일 영웅의 모습으로 생을 마쳤다. 31살 젊은 나이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