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병돈 칼럼] 대한제국 군대해산의 진실을 고함

[아시아엔=민병돈 <아시아엔> 대기자, 전 육사 교장] 8월1일 아침 8시(융희 원년, 1907년) 비가 쏟아지는 가운데 시위(侍衛) 혼성여단장 양성환(梁性煥) 이하 시위보병 연대장과 기병 및 포병대장들 전원이 일본군사령관 하세가와(長谷川好道) 관저로 급히 소집되었다. 그리고 이 자리에서 군부대신 이병무(李秉武)가 황제의 조칙(詔勅)을 낭독했다. 부대 전원을 이날 10시까지 훈련원에 집합시킨 후 부대해체명령에 복종하도록 하라는 것이었다.

여단장 이하 각지휘관들은 크게 놀라며 솟구치는 분노를 주체할 수 없었으나 이미 일본군이 주도면밀하게 준비하여 겹겹이 포위하고 삼엄하게 감시하는 상황에서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 그리하여 각자 부대에 돌아와 “오늘은 도수(맨손)훈련이 있으니 ‘비무장’으로 훈련원에 집합하라”고 지시했다. 그리하여 부대원들은 지시받은 대로 그곳에 비무장으로 모였다.

그들 앞에 군부 협판(協辦) 한진창(韓鎭昌)이 일본군 장교들과 함께 나타나 간단히 해체 조칙(명령)을 전달한 다음 은급(恩給)이라는 명목으로 하사관에게 80원, 병들에게는 복무 연수에 따라 50원 또는 25원씩 지폐로 차등 지급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군모와 견장과 허리에 찬 대검을 회수한 후 해산을 명했다. 바로 그때 한 병사가 그곳으로 급히 달려와 대대장이 자결하였음을 알렸다.

자결한 박승환(朴勝煥) 참령(소령)은 시위보병 제1연대 제1대대장으로 그날 아침 일본군 사령관 하세가와의 관저에 집합하라는 지시에 몸이 불편하여 자기대신 중대장을 한사람 보낸다고 하며 응하지 않았다. 그리고 곧 군대해체의 조칙이 내렸음을 알고는 통분함을 참지 못하여 휴대했던 권총으로 자결하고 말았다. 대대장의 자결을 알게 된 대대원들은 격분하여 받은 지폐를 찢어버리며 부대의 탄약고를 부수고 실탄을 나누어 가지고 그들을 포위하며 다가오는 일본군을 상대로 교전을 벌였다. 그곳에 함께 모였던 제2보병연대 제2대대 장병들도 즉각 그들과 합세하여 훈련원을 벗어나 남대문 일대에서 일본군과 교전했다. 그러나 결국 중과부적(衆寡不敵)으로 우리측에 200여명, 적측에 100여명의 사상자를 내고 전투가 끝났다.

사실 시위부대의 해체가 (순종)황제의 조칙에 따른 것이라고는 하지만, 일제(日帝)가 고종황제를 강제로 퇴위케 하고 그의 후계자로 황제의 자리에 앉힌 나이 어린 순종(純宗)이 일제의 강압에 어쩔 수 없이 내린 것임을 알 만한 사람은 다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해체된 시위부대 장병들이 의병이 되어 일본군을 상대로 전투를 계속했고 여러 지방 관아(官衙)에 소속된 진위대(鎭衛隊) 장병들도 이에 호응하여 거국적 의병항쟁을 시작하였다.

이들 의병들은 임진왜란(1592~1598)때의 그것과는 전투력에서 훨씬 달랐다. 임진왜란 때의 의병은 전술·전기에는 문외한인 유생들이 이끌었기 때문에 그 의기만은 대단했지만 실전에서의 전투력은 별로 강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번의 의병은 한성(서울)과 지방관아의 정규군 출신 장병으로 구성되었기 때문에 그 의기와 함께 실전의 전투력도 강하여 일본군 부대들에게 상당한 피해와 함께 어려움을 안겨 주었다. 그리고 이들 중 많은 수가 중국 등지로 탈출하여 그곳에서 독립군·광복군의 구성원으로 항일독립투쟁을 끈질기게 계속하였다. 그들의 애국심과 독립정신이 우리 현대사에서 매우 높이 평가 받고 있음은 지극히 마땅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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