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병돈 칼럼] 대영제국, 황금에 눈 멀어 약소국 침략 ‘보아전쟁’

보어전쟁 참전 영국군

[아시아엔=민병돈 <아시아엔> 대기자, 전 육사 교장] 바다의 떠돌이 네덜란드인들이 18세기에 남(南)아프리카 케이프 일대에 정착하면서 이주민이 늘어나 50만명에 이르자 케이프 동쪽에 오렌지자유국(Orange Free State)과 트란스발공화국(Transvaal)을 세워 농사를 짓고 살면서 스스로를 보어인(Boer)이라 했다. 그러던 중에 이 지역 여기저기에서 양질의 금광들이 잇따라 발견되었다. 이에 보어인들은 기뻐서 어쩔 줄 몰라 했다.

동쪽 해안일대에 식민지를 건설하고 이를 확장해 나가던 영국인들이 보어인들의 거주 지역에 금광들이 발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걷잡을 수 없는 욕심이 발동했다. 그리고 그 금광들을 자기네들이 가져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생각이 이에 이르자 그들은 지체 없이 보아인들을 공격했다. 이에 보아인들도 자기들의 땅과 황금(금광들)을 지킬 굳은 의지로 대항했다. 보아전쟁(Anglo-Boer War)이 시작된 것이다.

사실 인구 겨우 50만명의 농업국이 강력한 정규군을 가진 영국인들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더욱이 급히 서둘러 9만명 규모의 군대를 편성하기는 했지만 그들은 평소 훈련도 받아 본 일 없는 민병대 수준의 약체로서 경험 많은 영국 정규군 부대의 적수는 아니었다. 상식에 비추어 보아도 이 전쟁의 승패는 이미 결정되어 있는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었다. 따라서 영국인들은 여유만만하게 일부 소부대를 보내 단숨에 전쟁 같지도 않은 이 싸움을 끝낼 생각이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전투는 좀처럼 쉽게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고 계속되고 있었다. 그리하여 영국인들은 조금 더 많은 병력을 투입했지만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조금씩, 조금씩 축차적으로 더 많은 병력을 투입했지만 성과는 없었다. 시간이 흘러 1899년 겨울 시작한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전투경험 많은 영국 정규군 부대들이 보잘 것 없는 보아인 민병대들의 게릴라전에 말려들어 고전에 고전을 거듭하고 있었던 것이다.

게릴라전은 약자가 선택하는 전법이다. 보아인들은 자기들이 약자임을 잘 알고 강한 영국군이 경험해 보지 못한 게릴라전으로 자기들의 땅, 자기들이 익숙한 환경에서 적을 이리저리 끌고 다니며 피로하게 만들고 군과 민이 힘을 합쳐 피로한 적을 타격하여 곳곳에서 승리를 거두고 있었다. 영국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청년 장교 윈스턴 처칠(Winston Churchill)대위도 이 싸움에서 포로로 잡혀 수용소 생활을 하다가 탈출하여 영국 국민의 영웅대접을 받으며 귀환한 바 있다.

개전 2년반 만인 1902년 5월 영국의 승리로 전쟁은 끝났지만 세계는 잘 싸운 보아인들에게 박수를 보냈고 탐욕으로 전쟁을 시작하여 고전 끝에 겨우 이긴 영국에 비난과 조롱을 쏟아 부었다. 영국 또한 스스로 반성하고 육군은 보아군의 훌륭한 전술과 제도 등을 연구, 모방하여 일대 개혁을 단행했다. 보아군 부대명인 ‘코만도’를 그대로 따와서 같은 이름의 영국 특수부대 ‘코만도’를 창설했다. 영국군의 화려하고 멋있는 복장을 보아군과 같은, 주변 환경에 어울리는 국방색(위장색) 복장과 간편한 베레모로 바꾸어, 이후 세계 여러 나라의 군복 색깔이 국방색으로 바뀌었다. 영국인의 탐욕이 부른 mini전쟁이 세계 각국 군대에 미친 영향은 mini가 아닌 maxi이며 기념비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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