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병돈 대기자 칼럼] 한국전쟁 정전 63돌···2년 협상 끝 ‘원치 않는 결론’

[아시아엔=민병돈 <아시아엔> 대기자, 전 육사 교장] “정전반대! 정전반대!” 시위군중의 구호가 온 천지에 퍼져 나갔다. 외신기자들도 시위하는 군중의 모습을 열심히 사진 찍으며 취재한다.

도대체 왜들 저럴까? 전쟁은 하지 않는 것이 좋고, 하고있는 전쟁도 빨리 끝내는 것이 좋지 않은가? 전선에서 싸우고 있는 자식, 형제, 친구들, 이웃들도 전쟁 그만하고 살아서 돌아와야 하지 않겠나? 그렇다. 그런데 이 전쟁은 북한의 남침으로 시작된 싸움이다. 이 전쟁으로 우리 대한민국은 엄청난 인명과 재산의 손실을 보았고 도시들은 파괴되었으며, 국토가 초토화되었다.

무엇보다도 뼈아픈 것은 신생 대한민국의 정치, 경제, 사회, 교육, 문화, 과학기술, 정보통신 등 여러 분야의 발전이 정지되면서 우리 가슴에 지울 수 없는 원한을 심어 놓았다. 그러므로 기왕에 하고 있는 전쟁을 끝장내야 하는데, 적의 전쟁지속능력이 고갈되어 망해가는 마당에 우리가 천신만고 끝에 승기(勝機)를 잡으니 느닷없이 싸움 그만하라고 한다. 이른바 정전(停戰)에 동의하라는 염치없는 말을 하고 있다. 안될 말이다. 우리는 이제 끝장을 봐야 한다.

끝장을 본다함은 우리가 이 싸움에 이겨 북한을 평정하고 이 땅에 자유민주주의 체제 하에 통일된 대한민국을 세우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것은 우리의 생각이요 주장일 뿐이다. 국제정치는 강자의 논리가 지배한다. 결국 우리의 거족적인 반대에도 불구하고 정전회담은 전 세계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된 가운데 1951년 7월10일 오전 11시 서울에서 약 80km 서북방, 적의 점령지역 내의 개성, 판문점에서 개최되었다.

우리 국민은 그저 맥없이 신문·방송의 보도를 통해서 회담 진행에 관한 소식을 들을 수밖에 없었다. 회담은 뜻밖에 포로송환(교환) 문제로 2년을 끌었다. UN군 측은 14만명에 가까운 포로를 수용하고 있었는데 북측은 그들이 수용하고 있는 포로의 수조차 제대로 밝히지 않았다. UN군측이 상호 1대1교환을 주장한데 반하여 적은 무조건 “전원 송환” 요구를 굽히지 않았다.

결국 적의 요구대로 되었다. 다만 리승만 대통령의 결단으로 6월18일 북으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이른바 반공포로 3만5698명의 수용소탈출을 국군경비병들이 암묵적으로 도와 이들 중 2만7388명이 탈출에 성공해 한국사회에 정착하여 자유민으로 살게 되었다. 탈출 도중 미군의 총격으로 60여명의 사망자와 다수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리승만 대통령의 이러한 결단에 북한은 격렬히 비난하고 나섰다. 그리고 정전회담은 결렬될 듯이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담은 계속 진행되고 있었다. 왜냐하면 정전이야말로 망해가는 북한에게 절실히 필요했고 미국 또한 정전을 강력히 원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는 1953년 제34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아이젠하우워(D.D.Eisenhower)장군의 선거공약에도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남쪽과 북쪽으로 오리내리던 전선도 이제 북위 38도선 일대에서 거의 안정되어가는 지금이 정전의 적기로 생각되기도 했던 것 같다.

여기에 한국국민의 간절한 희망인 ‘전승과 남북통일’은 현 상태에서의 정전이라는 ‘미국의 국익’에 압도되었고 1953년 7월27일 오전 10시 쌍방(한국, 미국과 북한, 중공)대표들이 서명한 정전협정 문서는 리승만 한국대통령의 서명만 빠진 채 그날 22시에 효력을 발했다.

이렇게 되자 노련한 리승만 대통령은, 이후 한국군의 대북도발로 정전이 무효화되지 않을까 염려하는 미국을 상대로 ‘원치 않는 정전’에 따른 상당한 반대급부를 받아냈다. 즉 한미상호방위조약, 군사원조(한국군 증강) 및 경제원조 등…. 이로써 우리나라는 안정된 가운데 경제발전을 이룰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다. 이때부터 경제강국 대한민국의 싹이 트기 시작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