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병돈 대기자 칼럼] 필리핀 6·25 참전 장교 중 40년 뒤 대통령 된 사람은?
[아시아엔=민병돈 <아시아엔> 대기자, 전 육사교장]?1950년 9월19일 필리핀 육군 1개 대대가 부산에 도착했다. 미국과 영국에 이은 세번째 참전국이다. 남침 한 달 만에 한반도 대부분을 점령한 북한군의 전선 사령부를 방문한 김일성이 해방 5주년기념 및 전승축하 행사를 할 수 있도록 8월15일 이전에 부산을 점령하라고 독전했다. 이에 따라 인민군은 중·서부전선의 10개 사단병력으로 낙동강도하작전을 끈질기게 강행했다. 하지만 국군과 미군은 40여일간 혈투 끝에 방어에 성공하고 UN군의 인천상륙(9월15일)에 호응하여 반격작전을 시작했다. 그때 필리핀 지상군이 도착했다. 가뭄에 단비가 내린 격이다.
당시 필리핀은 자국 내 반란군(공산군)과의 교전상황 아래 외국에 지상군을 파견할 형편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북한의 남침 직후 UN이 북한을 침략자로 규정하고 회원국들이 한국을 지원하라고 호소하자 필리핀은 공산반란군과 교전중인 10개 지상군 대대 중에서 가장 전투력이 강한 제10보병대대를 뽑아 보냈다.
사실은 그 전해(1949년)에 거대한 중국대륙이 마오쩌둥(毛澤東)의 홍군(紅軍)에 의하여 적화됨으로써 여러 후진국의 공산당들이 크게 고무되어 곳곳에서 반란과 내전을 일으키는 사태가 발생하고 있었다. 이에 자유세계 국민들은 공산권의 팽창을 걱정하고 있었다. 필리핀의 신속한 참전도 이러한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았다. 필리핀 정부는 이 보병대대에 경전차와 포병·공병·통신·의무병과를 배속하여 대대전투단(Battlion combat team)을 편성함으로써 전투력을 증강하고 6만 시민이 모인 환송식으로 장병 사기를 한껏 올려 출정시켰다. 마닐라항에서 수송선에 오른 이들은 4일간의 항해 끝에 부산항에 도착했다. 그들은 부산시민과 한국 정부대표 그리고 주한 UN대표의 열렬한 환영을 받은 후 경남 밀양으로 이동하여 현지 적응훈련을 받았다.
필리핀 제10대대전투단은 미 제25사단에 배속되어 사천비행장 경비를 담당했다가 중공군의 한반도 침입 후에는 미 제9군단에 배속되어 개성~평양간 도로 경비와 후방지역의 적 패잔병 소탕작전에 투입됐다.
1951년 4월, UN군의 재반격작전 때는 미 제3사단에 배속되어 전곡의 진상리 전투, 연천의 율동전투, 파주의 영국군 글로스터 대대 구출작전에 참가했다. 그 후 제10대대 전투단과 교대하여 들어온 제20대대 전투단, 그 후의 제19대대 전투단 그리고 그 후에 교대해 들어온 제14대대 전투단은 미 제45사단에 배속되어 철원의 이리(Eerie)고지와 아스널(Arsenal)고지 전투 그리고 강원도 양구의 백석산 전투와 크리스마스고지 전투 등 여러 전투에 참가하여 용맹을 떨쳤다. 그들 중 소대장으로 싸웠던 피델 발데스 라모스(Fidel Valdez Ramos)는 전후 승진에 승진을 거듭한 후 육군참모총장에 이어 국방장관까지 역임하는 동안 필리핀 국민의 사랑과 신뢰를 받았다.
그는 1992년 대통령선거에서 당선되어 6년간 대통령으로 훌륭한 업적을 남겼다. 6·25전쟁에 참전하여 우리와 함께 싸워준 필리핀군 장병들은 용감했고 성실했으며 헌신적이었다. 그들은 자신의 모국 이상으로 자유대한을 위해 잘 싸워주었다. 그들은 연인원 7420명이 참전, 112명의 전사자를 포함하여 468명의 인명피해를 입었다. 우리가 가장 어려웠던 때 우리에게 피를 흘리며 도움을 준 우리의 진정한 친구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