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병돈 칼럼] ‘태국 군대’ 6·25 파견 결정때 푸미폰 국왕 나이는?
[아시아엔=민병돈 <아시아엔> 대기자, 전 육사교장] 1950년 11월7일 부산항에 입항한 태국 국적의 프리킷함 2척과 수송선 1척에서 체구는 크지 않으나 까무잡잡한 피부에 눈이 유난히 반짝이는 군인들이 질서있게 열을 지어 부두에 내렸다. 태국의 육군 보병대대다. 태국은 6·25 전쟁 직후 북한을 침략자로 규정하고 한국을 도와주자는, UN의 결의에 즉각 호응하고 나섰다. 그리고 남침 엿새만인 6월30일 그 나라에서 세계 제1의 수확량을 자랑하는 쌀을 한국에 보내주겠다고 UN에 제의했다. UN은 당장 전투부대의 지원이 절실하다고 권고하고, 태국은 이에 전투부대 파견을 결정했다. 태국은 1개 여단(약 4000명)의 파견을 결정하고 7월 중순 이를 UN에 통보했다. 아시아 국가 중에서는 최초의 참전결정이었던 것이다. 이에 따라 태국 정부는 왕세자 티시트 디스퐁사 디스쿨 소장을 원정군 사령관으로 임명하고 본격적인 파병준비를 시작했다. 그리고 세자는 10월 중순에 한국을 방문하여 관계당국자들과 업무협의에 들어갔다.
그런데 이때 한반도에서의 전황은, 한국군과 UN군이 인천상륙작전에 성공하여 빼앗겼던 수도를 탈환하고 그 여세로 북위 38도선을 돌파한 후 적을 추격하여 북방의 한·중 국경선인 압록강과 두만강을 향하여 파죽지세로 진격해 들어가고 있었다. 그래서 북한은 곧 패망하고 한국이 주도하는 자유민주주의 체제 하의 통일이 눈앞에 다가온 것으로 보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태국이 여단 규모의 병력을 파견하는 것은 너무 과하다고 생각하여 1개 보병대대로 그 규모를 축소하였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 의무대를 배속받은 1개 육군 보병대대가 끄리앙끄라이 중령 지휘하에 3척의 자국 함선(2척의 프리킷함과 1척의 수송선)에 분승하여 10월22일 태국을 떠나 16일간의 항해 끝에 한국의 부산항에 입항했다. 이들 태국 장병들은 운집한 부산시민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은 후 대구로 이동하여 UN군 수용소에 자리잡고 그곳에서 현지 적응훈련을 받았다.
훈련을 마친 대대본부와 예하 중대들은 각각 미 제1기병(기갑)사단과 함께 미 제2보병사단에 배속되어 작전활동을 시작했다. 처음에 이들은 연천의 율동전투에서 잘 싸워 첫 전투부터 강군의 면모를 보여줬다. 그 후 철원지역의 포크찹 고지전투는 쌍방간에 추호도 물러설 수 없는 치열한 싸움을 계속한 끝에 유혈이 낭자한 승리를 거두었다. 그리고 고랑포의 나부리전투 또한 치열하기 이를 데 없는 것이었는데, 지칠 줄 모르는 강인한 투혼을 발휘해 잘 싸웠다. 특히 그 유명한 철원의 ‘철의 삼각주’에서의 김화 사동(蛇洞)전투는 처절한 싸움 끝에 피투성이가 된 승리를 거뒀다.
종교와 문화가 너무도 다른 미군부대에 배속돼 미군 지휘관의 작전명령에 따르면서도 태국 장병들은 국왕에 대한 충성심과 신앙심으로 일치단결하여 맡은 임무를 완수했다. 태국군은 1953년 7월27일 정전 때까지 연인원 6326명이 참전하여 129명의 전사자를 포함해 총 1273명의 병력손실을 당했다. 전장에서 보여준 태국군 장병들의 용맹함에 감동하여 사람들은 태국군 부대에 ‘작은 호랑이’(리틀 타이거)라는 애칭을 붙여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