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미폰 태국 국왕 영면···후임 왕세자 대신 시린톤 공주 가능성도?
[아시아엔=김국헌 전 국방부 정책기획관] 태국 푸미폰 국왕이 영면했다. 오늘날에도 입헌군주제가 제대로 유지되고 있는 나라는 영국 이외 몇 나라가 되지 않는다. 스웨덴, 노르웨이, 덴마크 등의 군주는 국왕이라기보다 제1시민에 가깝다. 푸미폰 국왕은 과거의 군주 못지않게 카리스마가 있는 국왕이었다. 그의 카리스마는 그냥 주어진 것이 아니라 스스로 노력으로 얻은 것이다.
태국은 왕실의 권위와 군부의 권력, 승려의 인도(引導)가 삼위일체로 결합되어 있는 특이한 나라다. 이 삼위일체를 중심으로 국민은 단결되어 있다. 대중의 인기로 집권한 탁신은 이 구조 밖에 위치하였기 때문에 축출되었다. 태국에는 수시로 쿠데타가 일어났다. 그러나 국왕의 승인이 없으면 실패한다. 국왕이 권력은 행사하지 않지만 권위가 대단하기 때문이다. 쿠데타를 일으킨 수친다와 잠롱 방콕시장이 무릎으로 국왕에 다가가던 광경이 생생하다. 푸미폰 국왕은 일생 국민을 위한 봉사로 국민으로부터 무한한 존경을 받았기 때문에 그런 권위가 있는 것이다.
태국은 서구열강의 침탈 속에서 일본을 제외하고는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독립을 유지해온 나라다. 태국은 버마에서 동진하는 영국과, 인도차이나에서 서진하는 프랑스와의 각축에서 독립을 유지해냈다. 2차대전 때도 도조 히데키(東條)의 대동아공영권에 동조하여 일본군의 침입을 받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미국에는 선전포고를 하지 않았다. 그래서 2차대전이 끝나자 미국이 주도하는 SEATO에 참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영화 <왕과 나>에서 보듯 일찍부터 유럽과 접촉해서 歐美를 알고, 외교적 지혜를 발휘했기 때문이다.
태국은 일본과 각별한 친선관계를 유지해온 나라다. 왕실과 왕실의 유대도 각별하지만 16세기부터 동남아로 진출한 일본 상인들이 태국에 주로 나갔던 까닭이다. 화교가 동남아에 나타난 것과 거의 같은 시기다. 일본의 동남아 진출은 명치유신 전에도 이미 활발했다. 쇄국으로 일관해온 우리와는 국가 경영의 차원이 달랐다.
푸미폰 국왕의 후사(後嗣)를 두고 궁금하다. 왕세자가 방탕한 생활로 국민의 신뢰를 받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국민의 사랑을 받는 시린톤 공주가 왕위에 오를 수도 있다. 국왕이 국민의 신뢰와 존경을 받는 것은 왕실의 존속에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영국 왕실의 후사도 변동이 있을 수 있다. 최근 찰스 왕세자가 스코틀랜드에 가게를 냈다고 한다. 에피소드로 그냥 넘길 일이 아니다. 영국민의 사랑을 받았던 다이아나는 죽어서도 Princess of Wales다. 카밀라는 콘월 공작부인(Dutches of Cornwall)이다.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후계는 바로 왕세손 윌리암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찰스의 행보는 이를 예측케 하는 전조다.
얼마 전 페레스 전 이스라엘 대통령이 서거했다. 페레스는 수상도 세 차례 지냈다. 이스라엘은 안보를 위해서는 어떤 행동도 마다하지 않는다. 외교도 거칠기 짝이 없어 여러 나라의 지탄도 받는다. 수상은 이스라엘을 지키는 전선의 대표다. 수상이라도 다 같지 않다. 네타냐후는 제3자가 보더라도 공연히, 주는 것 없이 밉게 보였다. 그러나 페레스는 같은 말이라도 달랐다. 푸미폰 국왕, 페레스 수상의 명복을 빈다.
국민의 사랑과 존경을 받는 지도자는 국가의 대들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