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일전쟁 보복 위해 이집트 사다트는 이스라엘의 단식기간 ‘욤키푸르’를 노렸다
[아시아엔=김국헌 전 국방부 정책기획관] 전략이론가로 유명한 클라우스 노어 교수는 <전략적 기습>(Strategic Surprise)이라는 책을 썼다. 전략적 기습은 통수권의 판단 착오를 노린 기습이다. 국가통수부(대통령과 국방장관)의 잘못된 전쟁지도는 작전사령관의 작전실패보다 중대한 결과를 가져온다.
1965년 3차 중동전쟁은 6일전쟁으로 불린다. 6월 5일 여명, 이스라엘 공군이 이집트·시리아·이라크·요르단 4개국의 비행장을 동시에 공격했다. 방공 레이더의 근무자들이 교대하는 시간을 노린 기습이었다. 450대의 MIG-21기가 지상에서 고스란히 파괴되었다. 항공기가 전쟁에 사용된 이래 적에게 가장 치명적인 피해를 준 작전이다. 이스라엘군은 통합군이었다. 지상군 여단과 공군 비행단을 통합 지휘했다. 지상군은 독일의 전격전을 넘어서는 진격을 했다. 6일 동안 이스라엘은 1600대의 적 전차를 유린했다. 이스라엘의 손해는 61대였다.
6일전쟁 참패로 아랍은 절치부심했다. 나세르가 숨진 이후 공군사령관 출신의 부통령 사다트가 대통령이 되었다. 1973년 이스라엘 수상은 골다 메이어, 국방장관은 모세 다얀이었다. 사다트는 유태인의 단식기간인 ‘욤키푸르’를 노렸다. 욤키푸르는 아랍인에게도 단식기간인 ‘라마단’이었다. 이스라엘과 아랍에서 둘 다 단식기간인 이 시기를 노린다는 것은 생각하기 어려운 기습이었다. IDF(이스라엘 국방군)를 믿었던 이스라엘은 말할 것도 없고 미국의 CIA도 이를 탐지하지 못했다. 6일전쟁에서의 승리로 명성이 절정에 달했던 다얀도 꼼짝 없이 당했다.
사다트는 작전도 치밀하게 준비했다. 이집트군은 수에즈 운하를 건너 모래언덕 요새인 바레브 라인을 물대포로 허물었다. 수에즈운하를 도하하여 이스라엘군을 기습한 이집트군은 쾌속 진격했다. 그러나 예비군을 동원하여 반격에 나선 이스라엘군이 시리아의 다마스커스에 진격하고, 수에즈운하를 건너 카이로에 육박하자 다급해진 사다트는 소련에 지원을 요청한다. 이스라엘과 아랍은 더 이상 파국을 피하고자 하는 미국과 소련의 중재로 정전에 합의한다. 이후 사다트는 카터의 주선으로 베긴과 캠프데이비드 회담에서 평화협정을 맺는다. 이에 불만을 가진 군내의 과격분자에 의해 사다트는 군사 파레이드 중 암살당한다. 이스라엘에서는 메이어 수상이 물러나고 페레스가 뒤를 이었으며, 다얀 국방장관도 물러나고 카이로에 육박하여 국민들의 신망을 얻은 샤론이 국방장관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