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의 삼국통일에 숨겨진 얘기들
[아시아엔=김국헌 전 국방부 정책기획관, <대한민국건국사] 저자] 신라의 삼국통일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평가 못지 않게 부정적 평가도 있다. 고구려가 중심이 되어 통일을 이루었으면 하는 생각이 맴돌고 있는 반면, 신라가 당을 상대로 또 다른 대전을 치루고 이를 이겨낸 과정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제7문무왕 하에는 “이근행이 군사 20만을 거느리고 매소성에 둔쳤으므로, 우리 군사는 이를 쳐서 말 3만380필을 얻었으며, 그 나머지의 (얻은) 병기도 이에 상당하였다”(李謹行率兵二十萬, 屯買肖城, 我軍擊走之, 得戰馬三萬三百八十匹. 其餘兵仗稱是)라고 되어 있으나 그밖에 기술이 없다. 20만 군을 격파하고 말 3만여필을 노획한 전과가 이렇게 가벼이 지나가도 되는가? 이병도의 <국사대관>에는 “이근행의 대군이 매소성에 내둔하였으므로 신라군(羅軍)은 이를 격파하여 역시 다수의 전마와 병기를 획득하였다”고 딱 한줄만 기술하고 있을 뿐, 아무런 평가도 없다. 그러나 매소성 전역은 양만춘의 안시성 전투와 맞먹는 대첩 아닌가?
백제는 신라와 당의 연합군에 의해 서기 660년 망했다. 고구려는 668년 망했다. 당은 웅진에 웅진도독부를 두고 평양에 안동도호부를 설치하였으며, 계림도독부까지 두어 신라도 지배하에 두려하였다. 신라는 결연히 맞서 당과 결전을 벌인다. 당은 675년 매소성 전투, 기벌포 해전에서 패한 후 676년 안동도호부를 철수시킨다. 안동도호부가 물러간 이후에는 신라는 당과 (오늘날로 보면) 평화조약을 맺고 번성하는 당의 세계질서에 들어갔기 때문에 당의 아픈 데를 들추지를 않았다. 이러한 역사서술은 김부식의 삼국사기에 그대로 유지되어 왔고, 사대(事大)를 국시로 하는 조선도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는 면밀히 들추어 보아야 한다. 중국과의 역사전쟁에 있어 우리의 약점과 강점을 제대로 알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근행의 당군은 말갈과 거란의 기병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기병은 오늘날의 전차다. 고대에 기병 1명은 야전에서 보병 7명을 상대할 수 있고 산악지에서도 보병 4명을 상대할 수 있는 것으로 평가되었다. 기마병의 강점은 오늘날 탱크와 같이 기동성과 충격성이다. 당의 기병을 제압한 것은 신라의 장창병(長槍兵)과 천보노(千步弩)였다. 신라군은 돌격하는 당 기병에 원거리에서 천보노를 발사하였다. 천보노는 1000보를 날아갈 수 있는 석궁이다. 다음에 장창병으로 당의 기병을 가로막았다. 장창으로 무장된 밀집보병이 기병을 상대로 승리한 것은 세계 전사상 드물지 않다. 신라가 얻은 전마가 3만필이 넘었다는 것은 이근행의 기병대가 와해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신라가 당시의 세계제국 당을 물리쳤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당은 안동도호부를 철수한 후 신라와 교류를 텄다. 이로써 신라는 페르시아에서 장안을 거쳐 경주에 이르는 실크로드의 한 부분으로 번영을 누렸다. 백제와 고구려는 썩은 나무가 무너지듯이 내부적으로 무너졌다. 신라는 무열왕과 김유신, 문무왕의 영도 아래 통일을 이루고 당으로부터 민족을 지켜내었다. 신라의 삼국통일의 의의는 여기에서 찾아야 한다.
매초성 전역은 전술, 장비 차원에서도 신라가 우세하였다는 평가가 잘 이루어지지 않았던 탓에 7세기 동아시아의 역사를 흔든 대전역이 이토록 가려져 있었던 것은 유감이다.
이병도의 <국사대관>이 이 부분을 이렇게 간략하게 다루고 넘어간 것도 심히 괴이하다. 이것이 삼국통일의 교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