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벨상 계절, 한국에서 노벨상수상자 배출하려면

[아시아엔=김국헌 전 국방부 정책기획관] 일본의 유카와 히데키는 1949년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하였다. 그의 ‘중간자 이론’도 탁월하였지만 패전 후 그의 노벨상 수상은 일본 국민의 사기를 크게 진작하였다. 그의 수상은 2차대전에서 미국과 영국을 상대로 전쟁을 일으킨 일본의 국력과 이를 뒷받침했던 과학기술력, 특히 교토대학교 물리학부의 성과가 쌓인 것이다.

노벨 물리학상, 화학상, 생리의학상은 미국이 압도적이다. 영국, 독일, 프랑스, 러시아가 뒤를 잇는다. 이들 훨씬 뒤에 일본이 있다. 이들이 노벨상을 독점하는 것은 “에베레스트는 히말라야가 있어서 있다”는 말로 표현할 수 있다. 이밖에 나라들은 도저히 이들을 따라갈 수 없다.

G2라고 하는 중국도 없다. 일본은 24명을 배출하였는데 이것은 한국이 넘보기에도 어려운 것이다. 이것은 앞으로 반백년 동안 바뀌지 않을 것이다. 한국이 성숙한 국가를 지향하는 데 노벨상도 한 지표가 된다. 그러나 될 수 없는 것은 안 되는 것이다. 물리학상, 화학상, 생리의학상을 위해서는 히말라야에 있어야 된다. 세계적인 학자와 잘 가르칠 수 있는 교수를 구별하고 인재를 키우는 전략을 장기적 안목으로 다듬어야 한다.

문학상은 성격이 좀 다르다. 언어로 이루어지는 문학은 세계적으로 하나의 잣대로 잴 수 없다. 때문에 그 나라에서 평가받는 것을 중점으로 한다. 일본에서는 1968년 가와바타 야스나리(川端康成)가 <설국>(雪國)으로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일본의 미를 잘 표현한 서정문학의 정점을 이룬다고 평가되고 있다. 그러나 일본어를 모국어로 쓰지 않는 사람의 동감을 얻기는 어렵다. 마치 외국인이 한국어를 아무리 잘한다고 해도 “이런 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를 우리가 느끼는 것 같이 멋·맛·끼를 이해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세계의 공용어라고 할 수 있는 영어로 발표된 작품이 수상에 다가가기에 유리하기 마련이다. 1960년대 소련의 파스테르나크의 <닥터 지바고>는 작품으로서 워낙 탁월하였다.

한국에서 노벨 문학상을 추천한다면 김승옥의 <무진기행>도 그 하나다. 외국인에게 설명한다면 일본의 <설국>을 들면 쉬울 것이다. 박경리의 대하소설 <토지>도 국내에서는 정평이 내려진 대작이다. 작가 박경리는 이미 고인이 되어 노벨상과는 무관하게 되었지만 한국문학사에서 토지는 한국인에게는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와 같은 대작으로 기억될 것이다. 앞으로 통일을 지향해나가는 데 있어서 민족의 등대요 촛불이 될 수도 있다.

평화상 수상자를 선정하기는 더욱 어렵다. 보편적으로 세계평화를 위해 기여했다고 할 수 있는 인물을 찾기는 어렵다. 히틀러를 거꾸러뜨려 세계에 평화를 가져온 중심인물의 하나라고 하기에 이론이 없는 영국의 처칠 수상도 평화상을 받은 것이 아니라 <2차대전사>로 문학상을 받았다. 중동 평화협상을 두고 이스라엘의 라빈 수상과 PLO의 아라파트, 월남전 종전협상과 관련하여 키신저와 레둑토가 수상한 것은 노벨평화상을 희화화(??化)시켰다. 드물게는 남아프리카의 넬슨 만델라와 같이 세계의 공감을 받은 경우도 있었다. 중국 류샤오보의 평화상 수상은 중국 공산당 통치를 변화시키려는 세계인의 압력을 대변한다. 고르바초프의 수상은 인류 공동의 적인 공산체제를 몰락시킨 데 대한 고마움의 표시다. 노벨상의 성격과 우리의 처지를 잘 교량(較量)하여 적절한 잣대로 삼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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