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틀 남은 기해년 ‘화해’와 ‘용서’로 마무리?”···”넵, 만델라처럼!”
[아시아엔=김덕권 원불교문인협회 명예회장] 용서(容恕)를 사전에서 찾아보니 “꾸짖거나 벌을 주지 않고 너그럽게 살펴 이해하다”라고 나와 있다. 그런데 용서는 신(神)만이 할 수 있는 권능(權能)일까?
요즘 용서에 대한 연구가 많아지고 있다고 한다. 미국 위스콘신대의 로버트 엔라이트(Robert Enright) 박사는 ‘국제용서연구소’를 창립하고, 용서연구의 주도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이 연구에서 일반적으로 신경질적이며 노여움을 많이 하는 사람들은 오랜 기간이 지난 후에도 다른 사람들보다도 용서하기가 힘들다는 것을 발견했다.
특히 이러한 사람들이 자신들에게 피해를 준 사람을 피하기를 원하고 2년반 후에는 복수를 원하기도 한다. 연구 결과 용서를 하는 사람들이 분노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 보다 더 행복하고 건강하게 산다. 용서를 할 때 심장혈관 및 신경계 기능을 증진시킨다고 한다. 또 질병에도 적게 고통을 겪는다고 한다.
반대로 용서를 잘 못하는 사람일수록 건강에 많은 문제를 가지고 있었다. 최근 분노를 용서로 승화시킨 미국 거주 한인 가족의 아름다운 이야기가 전해져 훈훈한 감동으로 다가왔다. 뉴욕의 한인 김영근 교수를 숨지게 한 살인자를 김 교수 가족이 용서하고 나선 것이다.
김 교수는 맨해튼의 한 은행 ATM에서 돈을 인출하던 중 돈을 빼앗기고 숨지는 참변을 당했다. 가해 남성이 김 교수 머리를 가격해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나흘 만에 숨졌다. 가해자는 불과 300달러를 빼앗아 달아났다가 이내 체포됐다.
하지만 불행을 당한 유족들이 가해자의 행위에 분노하지 않고 오히려 용서했다. 이에 최고 종신형까지 받을 수 있는 죄를 징역 10년형 정도로 감형받을 수 있도록 한 것이다. 김 교수의 유족이 법원에 선처를 호소하는 탄원서를 제기해서 나온 결과다.
고인의 아들은 “내가 얼마나 아플지는 선택할 수 없지만 내가 당신을 얼마나 미워할지는 선택할 수 있다. 그래서 나는 당신을 미워하지 않기로 했으며 당신을 용서한다”고 했다. 그리고 “이 세상을 훈훈하고 아름답게 만드는 것은 자신을 해친 자를 용서하고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 얼마나 가슴 뭉클한 선택인가.
왜 그들이 죽여도 시원찮을 살인자를 용서했을까? 분노 심을 안고 살아가야 하는 삶이 더 힘들기 때문이 아닐까? 그리고 그 분노가 오히려 자신들의 몸과 마음을 해치기 때문에 용서를 택했을 것이라 생각된다. 우리가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혹 증오심 때문에 불편한 감정을 갖고 있다면 살인을 한 사람까지도 용서한 이들을 한번 떠올려 보면 어떨까?
우리도 혹 마음속에 있는 모든 악 감정을 지닌 사람이 있다면 깨끗이 용서해 버리고 가면 좋겠다. 분노가 마음에 쌓이면 결국 자신을 해치는 독이 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용서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가 있다.
첫째, 분노와 미움이 독이 되기 때문이다.
용서하지 않으면 그 분노와 미움이 독(毒)이 되어 본인을 해친다.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지독한 미움이 암(癌)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미움의 독을 해독할 수 있는 길이 바로 용서다.
둘째, 용서해야 속박에서 자유로워지기 때문이다.
‘용서’라는 그리스어 단어를 문자 그대로 풀어보면, ‘자신을 풀어주다, 멀리 놓아주다. 자유롭게 하다’라고 한다. 진실한 용서는 미움의 포로에서 자유를 준다. 용서를 하고 나면 자기가 풀어준 ‘포로’가 바로 우리 ‘자신’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셋째, 용서가 죄의 악순환을 끊는 길이기 때문이다.
복수는 복수를 낳는다. 그러나 용서는 서로가 사는 상생(相生)의 길이다. 용서만이 원한의 사슬을 끊고 모두가 함께 살 수 있게 해준다.
이틀 남은 기해년, 우리 모두 용서와 화해로 마무리하면 어떨까요? 20세기 아프리카 최고 지도자 만델라 대통령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