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국헌의 직필] 박정희 때 건설 여의도 ‘국가통수부 대피시설’ 시민공개에 거는 기대

[아시아엔=김국헌 전 국방부 정책기획관] 여의도에 있는 한 지하시설이 1975년 국군의날 행사에 대비해 박정희 대통령 지시로 설치된 ‘국가통수부 대피시설’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1975년이면 월남전이 종료되던 시점이다. 국군의날에는 대통령-국방부장관-각군 참모총장 등 전쟁지도부가 모두 참석한다. 전방의 작전 지휘부는 최고도의 경계태세를 유지하지만 전쟁지도부에 일이 생기면 대단히 낭패다.

1981년 10월 이집트의 사다트 대통령이 암살당했다. 4차 중동전을 기념하던 군사 파레이드 도중 열병부대에 섞여 있던 자들에 의해 기습공격을 받은 것이다. 사다트는 이스라엘과 평화협상을 성립시켜 베긴 수상과 함께 1978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하였는데 여기에 불만을 품은 극단주의자들이 일을 저지른 것이다. 1984년 인도의 간디 수상은 경호원들에 의해 암살되었다. 이러한 사고는 경호 경비상의 사고다.

이러한 경호 경비상의 사고를 넘어 적의 공격도 상정할 수 있다. 청계산에는 미 8군이 만든 벙커가 있는데, 이것은 놀랍게도 휴전 직후인 1955년 만들어졌다. 전쟁징후가 고도화되면 한미연합사는 용산의 지휘시설에서 바로 이 벙커로 이동한다. 벙커는 핵전쟁에도 대비할 수 있도록 건설되었는데 미국 콜로라도의 전략공군사령부가 모델이다. 우리의 전쟁지도본부도 이를 모델로 1970년대에 만들어졌다. 영국 수상관저 바로 밑에는 Cabinet War Room이 있다. 처칠 수상이 독일 공군의 공격을 당하면서도 전쟁을 지휘하던 곳이다. 전쟁내각과 통수부의 핵심만이 모여 능률적이고 경제적인 영국의 전쟁지도가 생생하게 그려지는 곳이다.

1968년 1.21사태를 맞은 박정희 대통령은 안보 취약요인에 대해 누구보다도 예민한 감각을 가졌다. 김일성 집단이 무슨 짓을 저지를 수 있는가에 항상 최악의 경우를 상정하고 대비하였다. 국군의날 행사장에 국가지도부의 긴급 대피시설을 만들도록 한 것은 당시 대통령의 신경이 얼마나 예민하게 곤두서 있었는가를 증언한다.

당시의 국방태세는 지금과 차이가 많다. 우리의 GDP는 1970년대 초반에야 겨우 북한을 넘어섰다. 미국에서는 월남전 패배에 자극받아 “강대국의 핵에 의한 위협에는 억제력을 제공하지만, 내란이나 침략에 대해서는 자국의 방어는 자국이 책임지라”는 닉슨독트린이 발표되었다. 자주국방을 위한 율곡사업도 1975년에 막 착수되었다. 우리는 그때 소총 하나도 만들지 못했다. 한미연합사는 1978년 설치됐다. 1970년대 중반의 위기상황은 지금의 세대가 상상하기 힘들다.

1983년 10월, 김일성 주석 시절, 그의 아들 김정일이 주도한 아웅산 테러사건을 보라. 김정은도 이러한 기습을 시도할 수 있다. 김영철의 특수부대는 이런데 쓰려고 키우고 있는 것이다. 지금은 주변을 극도로 위구(危懼)시 하여 장성택, 현영철을 참살한 정도이니 한국에 대한 공격보다는, 주변에 더 신경을 쓰고 있지만 말이다. 그러나 우리의 이런 심리를 노려 성동격서(聲東擊西)를 할 수도 있다는 것을 경호, 경비, 경계 관계자들은 한시도 잊어서는 안 된다.

증권거래소가 있는 여의도는 지금은 한국 번영의 상징이지만 당시는 허허 벌판이었다. 이 시설이 곧 시민들에게 개방된다고 하는데 우리 국민에게는 안보교육의 현장이 될 것이며, 외국인에게는 영국의 Cabinet War Room과 같은 관광명소가 될 것이다.

여의도 지하대피시설은 국가 지도자는 만반에 대비해야 된다는 것을 웅변으로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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