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진실과 오해···10월10일은 ‘조선노동당’ 아닌 ‘조선공산당북조선분국’ 창립 70주년

[아시아엔=김국헌 전 국방부 정책기획관] 1945년 10월 10일 조선공산당북조선분국이 구성됐다. 조선공산당 당수는 박헌영이고 본부는 서울에 있었다. 분국의 책임비서로 국내파 공산주의자 김용범이 선출되었다. 12월 17일 제3차 확대 집행위원회에서 김일성이 총비서로 선출되어 분국을 장악하게 되었다. 1946년 2월 8일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라는 기관이 생겨났다. 모든 것은 북한에 단독정권을 세우라는 스탈린의 9월 20일 지령에 따라 제25군 정치위원 스티코프의 치밀한 지휘로 이루어졌다.

1946년 11월 23일 조선공산당, 조선인민당, 남조선신민당이 연합하여 남조선노동당(남로당)이 만들어졌다. 당수는 초대 여운형, 2대 허헌, 3대 박헌영이었다. 조선의 로자 룩셈부르크 허정숙은 허헌의 딸이다. 그에 앞서, 박헌영과 직계는 화폐를 위조하다가 발각된 정판사사건으로 미군정의 추적을 받아 1946년 9월 월북하였다. 그는 해주에서 남로당을 지휘하였고, 1948년 9월 9일 남한을 대표하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성립에 참여하였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이 건국된 직후 10월 국군 14연대에 잠복했던 남로당에 의해 대규모 반란이 일어났다. 정부는 2개 여단으로 10월 29일까지 4백명을 사살하고 2300명을 생포하여 반란을 진압하였다. 1천여명은 지리산으로 도주하였는데 이후로 지리산은 공비들의 소굴이 되었다. 이 과정은 조정래의 역사소설 <太白山脈>에 잘 그려져 있다.

남로당으로서는 여·순 봉기는 조급한 모험이었다. 이는 남로당 중앙에서 통제된 것이 아니라 14연대가 공비토벌로 출동하는 것을 기화로 사병들을 선동한 전남도당 지창수의 돌출행동에 의한 것이었다. 여·순 봉기의 실패와 뒤이은 정부의 대대적 숙군에 의해 남로당의 군내 조직이 노출된 것은 남로당으로서는 뼈아픈 실책이었고, 국군으로서는 천만다행이었다.

유격투쟁이 최고조에 달한 것은 1949년 7월에서 9월에 이르는 ‘9월 공세’였다. 통일한국 정부수립을 위한 남북총선거를 요구하는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祖統)의 매니페스토에 따라 남로당 휘하의 모든 지하조직은 남한 전역에 걸친 무장투쟁을 전개하였다. 정부는 9월부터 공비토벌작전을 대대적으로 실시했다. 백선엽 등이 주축이 된 토벌작전은 1950년 3월까지 끌었다.

김일성은 이 과정에서 남로당과 대한민국을 동시에 소모하는 一石二鳥의 효과를 얻었다. 1949년 6월 북조선노동당과 남조선노동당은 북남조선노동당 공동중앙위원회로 통합되어 조선로동당이 창립되었다. 조선로동당의 기원은 여기다. 10월 10일이 로동당 창건 70주년이라고 하는 것은, 새정치민주연합이 1955년 창설된 민주당 창설 60주년을 기념하는 것이나, 중화인민공화국이 중화민국이 주체가 된 1945년 9월 3일 대일전승 70주년 축전을 벌리는 것과 같이 우스운 일이다.

10월 10일은 조선로동당이 아니라, 조선공산당북조선분국 창립 70주년이다. 바른 역사 교육은 이래서 중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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