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프전 중부군사령관 슈워르츠코프를 떠올리는 까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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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먼 슈워츠코프(Herbert Norman Schwarzkopf Jr., 1934년 8월 22일 – 2012년 12월 27일)는 미국의 육군대장이었다. 1991년 걸프전쟁을 지휘한 사령관으로 걸프전의 영웅으로 불리기도 한다.

[아시아엔=김국헌 전 국방부 정책기획관] 1991년 걸프전의 미 중부군사령관이던 슈워르츠코프(1934~2012) 대장은 2차대전시 독일의 롬멜, 미국의 패튼, 소련의 주코프, 영국의 몽고메리에 비길만한 명장이었다. 걸프전쟁은 7일간 하나의 전역(campaign)으로 마무리되었는데 슈워르츠코프는 하나의 전역으로 하나의 전쟁(war)을 이겨낸 장군이 되었다.

걸프전은 세계 최강의 미군의 실력을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레이건이 정치적으로 공산권을 해체시켰다고 한다면 슈워르츠코프는 군사적으로 미국이 무적임을 과시하였다. 세계는 미군의 압도적 전력과 작전술, 병참능력에 압도되었다. 러시아와 중국도 경악하였다. 시진핑과 푸틴도 이때 받은 충격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여 아직도 미국이 눈을 부릅뜨면 움츠려든다. 무엇보다도 김일성이 전율하였다. 어떻게든 핵무기를 가지려하고 화학생물 무기와 특수부대 등 비대칭 전력 육성에 집중하게 된 것도 이때 받은 충격 때문이었다.

미국의 걸프전 수행은 부시 대통령, 베이커 국무장관, 체니 국방장관, 파월 합참의장, 스크로우크로프트 안보보좌관 등에 의해 국가전략의 통합이 완벽하게 이루어졌다. 베이커 국무장관은 유엔을 통하여 전쟁수행 명분을 얻어내고 30개국에 달하는 다국적군, 특히 이질적인 서방제국과 아랍제국이 연합군을 구성하게 하였다. 체니 국방장관과 파월 합참의장은 세계에 걸친 미군의 전쟁준비와 수행을 지도하였다. 워싱턴에서 국방조직 전반을 조정 통제한 국방 수뇌진의 기능과 역할은 2차대전 당시 마샬 장군 이래 가장 돋보이는 것이었다.

슈워르츠코프 대장의 중앙사령부는 평시에는 할당된 부대가 없는 사령부였으므로 일상적인 관리업무에 신경을 쓰지 않고 2년 동안 전쟁모의 연습을 하면서 걸프전에 동원된 천문학적 물량의 장비와 물자를 미국 본토, 독일, 오키나와에서 중동으로 제 시간에 집중토록 하였다. 다국적군의 병력과 장비는 노르망디상륙작전을 능가하는 규모였고 투하된 폭탄은 5년간에 걸쳐 독일에 투하된 분량을 넘어섰다. 하루 2500소티가 넘는 항공기가 공역에서 전개되었다.

걸프전에서 미국과 미군의 힘은 유감없이 발휘되었으나 이 성공이 뒤에 적절하게 활용되지 못한 것은 유감이다. 부시 대통령의 아들 부시 2세 대통령이 이라크 전쟁과 아프간 전쟁에서 1조 달러의 전비를 쓰고 허덕이다가 겨우 빠져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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