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 의거 110년···대한 청년이 日수괴 이등박문 처단 100년
[아시아엔=민병돈 전 육사교장] 10월26일, 110년 전 이날 아침 9시15분, 만주순방길의 일본국 이토 히로부미 후작(이등박문, 伊藤博文)이 타고 온 열차가 하얼빈역에 도착했다.
역에는 러시아군 경호대와 여러 나라의 외교관들 그리고 구경하려고 몰려온 민간인들이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그들 중 일본인들은 일장기를 흔들며 만세를 불렀다. 이야말로 중국 속의 ‘일본의 날’이라 할 만했다. 그리고 잠시 후 이토 히로부미는 러시아제국 재정대신 코코프체프의 안내로 동청철도 총재 등 귀빈들의 영접을 받고, 도열한 러시아군 경호대를 사열하며 걸어오고 있었다.
이때 사람들 속에서 한 젊은이가 그에게 접근해 가며 10보 정도의 가까운 거리에서 권총으로 쏘아 쓰러뜨렸다. 이어서 이토의 측근 일본인 고관 3명도 쏘아 그들 모두 부상당했다(하얼빈 총영사 가와가미 도시히코, 궁내대신 모리 야스지로, 만철 이사 다나카 세이지). 그리고 나서 그 젊은이는 하늘을 우러러 (러시아말로) “꼬레아 우라! 꼬레아 우라! 꼬레아 우라!”(대한 만세)를 외친 후 의연한 모습으로 러시아 군인들에게 체포되었다.
사실 그의 이토 히로부미 처단은 악조건 하에서의 거사였다. 만주의 가을, 섭씨 영하 10도의 추운 날씨에 하얼빈역에서 밤을 지새, 몸이 꽁꽁 얼어있는 상태에서는 유연하게 움직일 수 없고, 손으로 권총을 제대로 움켜쥐기 힘들다. 더욱이 공복 상태에서는 몸이 덜덜 떨린다. 게다가 또 저격수는 긴장한 가운데 움직이는 표적을 정확하게 조준하기가 매우 어렵다. 이에 더하여 그는 이토의 얼굴을 알지 못하므로 걸어오는 사람들 중에서 쏘아야 할 표적을 순간적으로 결정하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는 불과 몇 초 동안에 급히 선택한 표적에 3발을 쏘아 3발 모두 명중시켰다. 이토와 함께 걸어오는 측근 3명에게 각각 1발씩 쏘아 그들 모두를 맞혔으니 참으로 놀라운 사격솜씨였다.
쓰러진 이토는 즉시 그가 타고 온 열차로 옮겨져 응급치료를 받았으나, 실탄 3발을 맞은 68세의 늙은이를 살리기에는 역부족, 30분 후인 오전 10시 그는 숨졌다. 그리고 이 특급뉴스는 즉각 전 세계로 퍼져 나갔고, 그를 쏜 젊은이는 ‘한국청년 안중근’(安重根)이라고 알려졌다.
이에 세계열강의 언론은 일본의 한국침략을 규탄했고, 일본의 만주침략 야욕에 분노하던 중국인들의 가슴에 항일의 불이 붙었다. 중국인들은 “(안중근이) 우리를 대신해 원수를 갚아 주었다”며 기뻐 어쩔 줄 몰라 했다. 중국의 국부 쑨원(孫文) 선생은 “(안중근의) 공은 삼한을 덮고 이름은 만국에 떨치나니, 백세의 삶은 아닐지라도 죽어서 천추에 빛나리!”라며 칭송했다.
많은 중국인들이 안중근을 소재로 한 시와 소설과 연극을 발표했다. 톈진 난카이(南開)대학의 저우언라이(周恩來)가 연출하는 연극에 그의 부인이 남장을 하고 안중근역을 맡아 출연하기도 했다. 그들은 우리 항일투사에게서 자극을 받으며 한국인과의 유대감을 갖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 사건을 담당한 러시아제국 검사 밀레르는 안중근과 함께 이 거사를 모의한 우덕순과 조도선 등 한국인 8명도 체포하여 간단한 신문을 마친 후 이들을 모두 신문조서와 함께 이날 밤 늦게 일본측에 넘겼다. 러시아는 러일전쟁(1904~1905년)에 패배한 후 일본에 비굴한 모습을 보이곤 했다.
그리하여 하얼빈 주재 일본영사관에 구금된 안중근은 그곳에서 미조부치 검사에게 조사를 받으며 그가 이토를 처단한 이유로 △한국 민(閔) 황후를 시해한 죄 △한국 황제를 폐위시킨 죄 △한국군대를 해산시킨 죄 등 이토의 15가지 죄목을 조리 있게 열거했다. 그리고 자신은 대한의군 참모중장으로서 일본국을 상대하여 싸웠으므로 자신을 만국공법(국제법)에 따라 전쟁포로로 대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재판은 많은 내?외국인 변호사들이 변론을 자청했음에도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오직 2명의 일본인 관선변호인만을 참여시킨 가운데 매우 신속히 진행되었다. 안중근은 구차하게 목숨을 구걸하지 않겠노라며 변호인을 선임하지 않았다. 판결은 송치된 지 13일만인 2월 14일(1910년) 오전 10시 관동도독부 지방법원에서 이루어졌다.
재판장 마나베는 “안중근을 사형, 우덕순을 징역 3년, 조도선과 유동하를 각각 징역 1년6개월에 처한다”고 선고했다. 이에 안중근은 재판장을 바라보고 미소지으며 “일본 형법에는 사형 이상의 벌은 없느냐?”고 조롱하며 “항소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이에 놀란 재판장이 감옥으로 안중근을 찾아와서 안중근이 상급법원에 상소할 것을 권유했다. 여기에는 안중근이 생에 대한 미련이 있는 듯한 모습을 세상에 드러내려는 간교한 저의가 엿보인다. 그러나 안중근의 마음은 추호도 흔들리지 않았고 오히려 그 자신이 직접 이토를 처단한 일에 만족해 했다. 이렇게 해서 우리 민족의 영웅이 탄생한 것이다.
한편 2009년 10월 일본 우편국은 ‘이등박문공 몰후(歿後) 100년 기념우표’ 20종을 발행했다. 우표에는 메이지(明治) 신정부의 초대 내각총리대신과 정계의 리더로서 근대일본국 건설에 기여한 그의 공로도 간략하게 기술되어 있다.
필자는 이 기념우표를 발행한 일본정부의 처사를 이해하기 쉽지 않다. 일본 근대사의 최고 원훈(元勳)이 한국의 이름 없는 청년의 총에 맞아 죽은 사건은 일본인에게는 가장 큰 치욕이며 통분할 일일 터인데, 이것이 그들에게 무슨 경사라고 ‘이등박문 공 몰후 100년 기념우표’를 발행했는지 모를 일이다. 오히려 한국인들이 기념할 일인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