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뼛속까지 군인’ 민병돈 장군의 순애보 “여보, 잘 가오. 당신 벌써 그립구려”

민병돈ㆍ구문자 부부의 생애 마지막 사진. 올초 며느리 김연주씨가 촬영했다.

[아시아엔=이상기 기자] 존경하는 민병돈 장군님! 반세기 넘게 장군님께서 꼭 지켜주신, 그리고 똑 같은 기간 장군님 곁을 지켜주신 사모님을 여의신 슬픔을 위로드릴 길이 없습니다.

꼭 1주일 전인 지난 6일 토요일 아침 매거진N 잘 받으셨다고 전화를 주신 장군님께 여쭈니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이 회장, 집사람이 2~3일밖에 못 살 것 같아. 좀처럼 눈물 안 흘리는 내가 그 사람 생각하면서 자주 울어. 그 사람 올해말까지만이라도 살아줬으면 좋겠어.”

장군님께선 종종 속내를 제게 보여주셨지요. 그게 감사하면서도 때론 송구하기도 했죠.

저도 두어달 전부터 담아둔 맘을 털어놨지요.

“짐작하시겠지만 매거진N 잡지도 내고 온라인 매체 운영하는 거 참 힘듭니다. 어떤 때 왜 시작했나 후회도 했지요. 그런데, 제가 이렇게 배짱있게 꾸려가고 용기를 되찾은 건 예수님을 다시 만나서입니다. 저는 매일 아침 예배를 드리고 하루를 시작합니다. 조정민 목사님이라고 엠비씨 기자 하던 분이 목사가 됐는데, 그분 말씀으로 하루를 시작하는 게 얼마나 고마운지 모릅니다.제게 닥치는 어려움을 견뎌낼 힘을 얻는 거지요.”

장군님은 잠자코 듣고만 계셨지요.

그러시더니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 사람 원래 카톨릭이야. 시집 와서 나 따라 불교가 됐는데, 절에 거의 안 나갔어.”

저는 마지막 가시는 길에 조정민 목사님이 기도로 함께 해주시면 좋겠다, 말씀드리고 장군님께선 그러자고 하셨지요.

그날 오후 사모님 면회를 다녀와 전화를 주신 장군님 음성이 아침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집 사람이 말을 했어. 기적같아. 너무 고마워. 너무. 어제 하고 어떻게 이렇게 다를 수가 있지, 기적이야 기적.” 그러면서 “그 사람 제발 올해 말까지만 내 곁에 있어주면 좋겠어” 하셨죠. 그 말씀을 들은 저도 그렇게 기쁠 수가 없었습니다.
3년 전 몹시 춥던 어느 겨울 날, 사모님을 함께 모시고 평택 초전박물관을 들른 후 예산에서 하룻밤 묵으며, 장군님의 아내사랑을 저는 깊이 느끼고 부끄럽기만 했습니다.

2017년 10월 초 민병돈 장군 자택 뜰에서

그때 기억이 돌연 떠올랐지요. 그리고 사흘 후인 지난 9일 저녁 장군님께서 비운 병실에서 조정민 목사님이 사모님 손을 꼭 잡고 기도를 올렸습니다. 사모님 눈가에는 눈물이 비쳤는데 그건 감사와 사랑의 눈물로 저는 받아들였습니다.

둘째 아들 내외와 장군님이 그토록 아끼시는 최승우 장군, 그리고 베이직교회 젊은 목회자들 모두 기쁨의 눈물을 보는 듯했습니다.최승우 장군과 저의 눈을 마주 보시는 사모님 얼굴에서 미소가 보였습니다.

저는 어서 회복되셔서 꽃구경 가시자고 말씀드렸는데…

존경하는 장군님, 제가 사모님을 처음 뵌 건 1993년 여름으로 기억합니다. 당시 한겨레신문 국방부 출입기자이던 저는 목동의 장군님 댁을 찾았지요. 당시 사모님이 차려주신 수박을 먹던 기억이 어제 같습니다. 그토록 시원하고 달콤한 맛을 언제 또 느낄는지요?

존경하는 장군님. 그후 매년 한두 차례 목동 댁을 찾을 때마다 두분은 계절마다 소박한 우리 꽃들로 가꾸어진 마당에 주로 계셨지요.

1996년께였지요. 장군님이 차를 몰아 지방 다녀오며 모은 송홧가루로 사모님이 다식을 빚으셨다며 저희 부부를 초대해 대접해주셨죠.

후배들 결혼식 주례를 맡아 지방에 다니실 때는 늘 새 커플과 혼사에 부담과 지장을 안 주시려 장군님께선 전날 미리 현지에 도착해 사모님과 데이트를 즐기곤 하셨지요.

존경하는 민병돈 장군님.

지난해 10월말 결혼 50주년을 맞아 병상에 누워계신 사모님과 그리도 기쁜 기억을 나누셨다고 하신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합니다.

20년 병상에 누워 계신 사모님을 직접 간병하며, 곁을 지키신 장군님. 그 허전함을 헤아릴 길이 없습니다.

2015년 초 세배차 댁에 들른 라훌 아이자즈 아시아엔 기자가 창밖을 내다보던 구문자씨를 앵글에 담았다.

사모님 간병을 누구에게도 맡기지 않고 몸소 다 해내신 장군님의 순애보는 아마도 ‘민따로’ 장군님의 또 다른 전설이 아닐까도 싶습니다.

지난 2월 하순 사모님이 합병증이 와 건국대병원 중환자실에 입원했다며 근심에 차있던 장군님.

그때도 “그 사람 올해 말까지만 꼭 살아 줬으면 좋겠어. 올해까지 꼭…”

올 정초 댁으로 전화를 드렸지요. 사모님께서 받으시고 “그이 외출하셨어요. 있다 들어오시면 전해드릴 게요.”

그러던 사모님께서 두달 남짓만에 장군님 곁을 떠나시다니요. 작년 추석 전날 댁을 찾은 저를 장군님께서 대문 밖까지 배웅하며 “세상에 이렇게 좋은 일이 어딨어. 의사가 그러는데 집사람 간암이 나아졌대. 그런 일이 있었어” 이렇게 말씀하셨죠.

그런데 몇 달 뒤 폐암으로 전이돼 머나먼 길을 떠나신 사모님, 그리고 장군님은 눈물로 배웅을 하고 계시죠.

장군님께선 늘 “내가 장군이면 이순신 장군은 뭐라고 불러야 한단 말이오. 나는 그저 뼛속까지 군인일 뿐이야” 하셨죠.

군인 중 진짜군인이신 민 장군님. 그러하신 장군님께선 아내의 고통에 꺼이 꺼이 우시는 모습을 굳이 감추지 않으셨지요.

장군님 따라 생전 핸드폰도 없이 사신 사모님. 장군님 가정의 다소 빈한한 듯 검박한 삶은 공과 사를 그토록 철저히 구분하신 장군님의 굳은 신념과 이를 묵묵히 감내하면서도 기뻐하신 사모님의 거룩한 심성의 다른 표현이지요.

존경하는 장군님.
‘회자정리 이자필반’이라고 했습니다. 떠나는 사모님을 보내는 장군님 심정을 어떻게 100분에 1이라도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결혼 50년간의 해로, 그리고 사모님이 병석에 누운 20년간.

그 곁에서 따스한 보살핌은 사모님에 대한 깊은 사랑을 넘어 세상과 세대를 뛰어넘는 귀감이 되고 있습니다.

존경하는 장군님.
사모님께서 눈을 감기 전, 젊은 시절 믿었던 하나님을 다시 만나서 평안한 가운데 눈을 감으셨을 거라 생각하니 다소 위로가 됩니다.

존경하는 장군님. 시대의 사표이자 롤모델이 되시는 장군님께서 부디 사모님 잃은 슬픔을 이겨내시어, 잠시 장군님 곁을 떠나신 사모님의 걱정거리가 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구문자 사모님의 평생 삶의 궤적이 두루 가족들에게 깊은 은혜로 전해지길 기도드립니다.

2109년 4월 14일

브라질 방문 중 이상기 삼가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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