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모] ‘혈죽선생’ 이원종 수석의 ‘따스한 경청’
아래 글을 쓴 최승우 예비역 장군은 1993년 4월 김영삼 정부의 군 개혁 과정에서 하나회 명단에 포함됐다는 이유로 보직해임 끝에 1995년 군복을 벗었다. 최승우 장군은 당시 이원종 정무수석의 요청으로 첫 만남 이후 26년 이상 교유를 해왔다. 두 사람은 지난 1월 하순에도 통화하며 “코로나19가 가라앉으며 식사를 하자”고 약속했다고 한다. <아시아엔>은 최승우 장군이 1일 보내온 글을 독자들과 공유한다. <편집자>
[아시아엔=최승우 전 예산군수, 육군 전 17사단장, 육군본부 인사참모부장 역임] 31일 별세한 이원종 전 청와대 정무수석과 나의 인연을 생각하며 성경 말씀이 먼저 머리에 떠오른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필자는 1995년 6월 30부로 34년간의 군 생활을 정년 전역으로 마감하고 잠시 휴식기간을 갖고 있었다. 집에서 조용히 쉬고 있던 어느 날 오후, 청와대에 근무하는 지인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장군님! 오늘 대통령(김영삼) 각하께서 이원종 정무수석을 불러 최승우 장군을 만나보라는 하명이 있었습니다.” 나는 뜻밖의 얘기를 전해 들으면서 순간 한방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나는 전혀 이해도 안 가고 무슨 뜻인지 상상도 못하겠는데···.”라고 말했더니, “아마 한자리 주시려는 것 같습니다”라는 말을 듣는 순간, 나로서는 멍~할 수밖에 없을 정도였다. 또한 이어서 “그때 옆에서 어느 분이 ‘각하! 최장군은 하나회입니다’라고 했는데 이에 각하께서는 즉시, ‘하나회가 무슨 상관이 있어, 사람만 괜찮으면 됐지’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아마도 오늘 내일 중으로 이원종 정무수석의 만찬초청 전화 연락이 있을 것입니다.” 이런 전화내용이었는데 당시 나로서는 참으로 황당한 기분이었다.
나는 곧 정무수석에 대해 알아보았는데 그는 경복고등학교 출신이었으며 보성고등학교 출신인 나보다 고등학교 기준으로 2년 선배였다. 다음날 예상대로 이원종 정무수석의 저녁 만찬 초청 전화를 받아 나는 기꺼이 수락했고 약속한 날 저녁에 롯데호텔 38층 식당에서 만났다. 그는 첫 인상이 참 좋았으며 서로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자리를 마주하고 앉았다. 초면이었지만 어색한 느낌도 전혀 없이 편안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어 참 좋았다. 그래서 공식적인 인사말과 함께 내 얘기를 시작했다.
“참 반갑습니다. 오늘 이렇게 초청해주신데 대해 우선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아울러 초면에 죄송합니다만 제가 이 수석께 한 말씀 제의하고 싶습니다” 하니, “예, 좋습니다. 얘기하시지요.” 나지막하고 정감어린 목소리였다. 곧 이어서 나는 “대화는 서로 주고 받는 얘기로 진행되는 것이 기본인데, 죄송합니다만 오늘은 이 수석께서 제 얘기를 들어주시는 방향으로 진행되었으면 좋겠습니다”라고 했다.
그는 “예, 좋습니다” 하며 아주 밝은 표정으로 쾌히 승낙했다. 순간 기분이 참 좋았다. “우선 감사드립니다!” 하니 나와 시선을 마주하며 조용한 미소로 답을 했다. 이어서 계속되는 내 말은, “며칠 전, 제가 집에 있던 날 오후였습니다. 집 전화벨이 울려서 받아보니 첫 마디가 ‘장군님이시지요?’ 라는 단순 질문이었고 그래서 ‘예, 최승우 장군입니다. 누구신데 무슨 일로 전화하셨습니까?’ 하니 대답이, ‘저는 oo일보 ooo기자입니다’였고 곧 이어서 다짜고짜로, ‘장군님은 하나회시지요?’ 라는 질문을 해왔습니다. 생면부지 신문기자의 전화 첫 질문으로서는 예의나 관례로도 아니다 싶어 순간 불쾌한 감정이 일었지만 이해할 수도 있다 여기고 조용히 물었습니다. ‘실례지만 우선 내 간단한 질문에 대한 답을 듣고 난 후, 그쪽 질문에 대한 답을 하겠는데 어떻게 생각해요?’ 라고 물으니 흔쾌히 ‘좋습니다’ 하기에, 제가 질문하기를, ‘나는 oo일보 기자가 몇 명인지 모르겠지만 현재 본인 스스로 생각과 판단에, 현 소속신문사 기자단 하나회에 본인은 속한다고 스스로 생각하나요?’ 물어보니 전혀 예상할 수도 없었던 뜻밖의 질문이었던지 잠시 침묵이 흐른 후에 대답하는 나지막한 말이 ‘저는 아직은 기자단 하나회에 속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는 답변이었습니다. 나는, 이 말을 듣는 순간 ‘머리회전이 빠르구나’라고 생각하면서 곧 이어서, ‘그러면 이제 더 이상 나의 답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라고 단도직입적인 질문을 하니 잠시 후, ‘대단히 감사합니다. 더 이상 필요 없겠습니다’라는 나지막한 목소리 답변을 들었는데 처음과는 달리, 매우 정중한 예의표시 감정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통화는 그 정도로 간단히 끝났습니다.”
나는 이어서 이 수석에게 내 평소 생각을 조용히 피력했다. “사람은 폐쇄적 성격이 아닌 한, 살아가는 가운데 사회 조직구성원으로서 자연스럽게 親疎의 인간관계가 형성됩니다. 모든 직종에도 해당되겠지만 군인세계도 마찬가지로 봅니다. 그런 중에 선택하건 선택 받건, 명칭이 있건 없건, 크건 작건 간에 상하 선후배 동료 등의 상호 신뢰관계 속에서 자연스럽게 어느 한 조직 구성요원으로 존재하게 될 수 도 있다고 봅니다.”
“믿거나 말거나 현재, 저의 이런 얘기는 통상 전혀 의미도 없겠고 믿을 수도 없다 하시겠지만 그래도 이 자리에서는 말씀드리고 싶어졌습니다. 저는 소위, ‘하나회’란 호칭을 당시 신문지상을 통해서 처음 접했고 그전에도 전혀 들은 적이 없었습니다. 수도경비사 근무 시에 선배들과 친소 회식모임에는 같이 참석을 했지만 어떤 비밀결사식의 자리는 결코 아니었습니다. 단지 같이 근무하는 군부대 내부에서의 상하간 만남 대화의 자리일 뿐이었지요. 이같은 사조직은 정치계 경제계 문화예술계 종교계 교육계… 등 물론 군부대 내의 여러 공조직 안에서도 자생적으로 상존한다고 보았습니다.”
“제 경우에도 고교시절 운동부 클럽활동이 있었고 그 후 군에서 수도경비사 중대장으로 재직 중에 당시 좋아하고 존경하는 선배들로부터 ‘국가와 군을 위한 헌신봉사’라는 명제에 공감을 했기에 자연히 친하게 지냈지만 선배들로부터는 ‘어떤 혜택이나 이익에 관련된 언급’은 전혀 들어 본 적도 없었습니다. 내 자신 스스로 선배들의 신뢰를 받고 있다는 인식과 함께 근무의욕과 사명감이 더욱 강해졌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습니다.”
“저는 ‘Power Game을 통한 人間浮沈의 역사교훈’을 비교적 일찍 성장과정에서 잘 터득했기에 소위 사조직 척결 명분으로 자행된 무차별 제재 환경 분위기 속에서 내게 닥친 어떤 불이익도 긍정적으로 적극 수용하면서 이를 슬기롭게 잘 극복할 수 있었고 나아가 이것도 내게 주어진 분명한 ‘나의 운명의 길’이라는 확고한 판단과 확신을 통해 내 자신 이렇게 건재할 수 있다고 자부합니다.”
“단지, 당시 김영삼 대통령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만큼은 분명 높아졌으며 진정 유능한 지도자라면 결코 그와 같은 결단의 행동은 절대 안했을 것이라는 생각도 했습니다. 저는 충남 예산의 시골 초등학교 6학년 1학기 마치고 1953년 초가을 서울 혜화동에 위치한 혜화초등학교로 전학을 했습니다. 당시 시골에서는 3학년 되어서도 국어책을 제대로 읽지 못하는 학생들도 간혹 있었지만 저는 특히 만화책을 많이 읽었기에 초등학교 입학 시점에서는 책을 눈으로 읽을 정도였으며 동시에 일부 아동 문학전집과 역사서적들을 통한 아동 양서들을 많이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 후 3학년부터는 집에 있던 삼국지 6권 전집을 접했으며 서울로 전학 이전에 3번을 熟讀할 정도로 심취했었습니다. 특히 관운장이 사망했던 대목에서는 너무나 슬픈 나머지 펑펑 울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제가 초등학교 입교 전부터 수년간 우리 집에서는 유명한 직산의 한학자 김정직 선생을 모시고 천자문, 초도문, 동문선습 그리고 명심보감 등 한학을 배웠으며 이를 통해 유년기부터 싹트고 길러진 인성이 제게는 소중한 유무형의 큰 자산이 되었음을 확신하며 삼국지에서 특히, ‘七縱七擒’ 등 故事의 敎訓과 함께 당시 성장과정의 어린 마음속에 올바른 가치관의 기반이 형성되고 새겨져 특히, 군 생활 기간 중 저의 리더십에 큰 밑거름이 되었다고 확신합니다. 또한 삼국지에서는 자신을 죽이려던 적장이 생포되면 몸소 포승줄을 풀어주고 내 사람 만들어 장차 대업완수의 기틀을 마련했던 지도자들의 훌륭한 인재 등용 모습을 이 수석께서도 잘 알고 계실 겁니다.”
“이제 저는, 현실 속의 어떤 원망과 증오도 자신에게 有害無益함을 잘 알고 있으며 아울러 대통령에 대해서는 초기의 증오심에서 점점 불쌍한 연민의 정으로 까지 바뀌게 되었으며 지금은, 내 자신을 이겨내고야 말았다는 승리의 자부심까지 갖게 되었습니다.”
“당시 신문에 난 명단을 보고서 알게 된 대부분 후배들은 훌륭한 능력과 자질을 인정받아 선배들로부터 순수하게 선택되었다고 보았습니다. 저나 선배들은 모두 장군 직위에 올라 군에서 나름 큰 역할까지 했다지만 그 후배들은 척결대상으로 분류되어 결국, 중령 대령에서 군 생활을 마감함으로써 청운의 꿈도 펴지 못하고 이민 가거나 새롭게 공부해서 학계나 일반 사회인으로 생활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선배들이 그대로 두었다면 대부분은 장군이 되어서 우리 국방 분야를 비롯해서 크게 기여했을 훌륭한 자질의 인재들이였는데 이를 무차별 잘라버려진 결과가 되어 참으로 마음이 아팠습니다.”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과의 관계로 엮여졌다고 말하지만 거리가 먼 얘기이고 절대다수 대부분은 선배들로부터 능력 인정을 받았던 결과 인생이 허망하게 변한 것이지 무슨 줄타기로 조직에 들었던 것은 결코 아니었기에 마음이 무척 아팠습니다.”
“물건은 임자가 있다지만 사람은 먼저 차지하는 사람이 임자라는 나의 생각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간직되어 있습니다. 훌륭한 지도자라면 누구 편, 누구 사람 구분 않고 인재들을 알아보고 내 사람 만들어서 잘 키워 큰일을 도모하는 능력을 구비해야만 할 텐데 지금은 이 정도의 도량을 못 갖춘 대통령의 그릇을 그대로 인정해야만 할 수밖에 없음이 참으로 서글퍼집니다.”
“또 한편으로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저를 진정으로 아끼고 사랑해 주셨던 종교계에서 존경받는 정진경 원로목사님과 일부 지인들이 당시 김영삼 대통령이 다니는 충현교회 목사님과 교분이 매우 두텁기에 저를 위해서 만난다는 소식을 듣고 목사님 만나 뵙고 ‘목사님, 감사합니다만 제 명예를 더럽히고 싶지 않습니다’라는 요지로 진지하게 말씀을 드렸고 목사님은 저를 너무나 잘 알고 계셨기에 제 뜻을 충분히 이해하셨으며 ‘최 장군이 불이익 받는 것이 사실 마음 아팠는데 모두 하나님 뜻으로 생각할게….’라는 말씀으로 충현교회 문제는 종결지었습니다.”
“그 이후 어느 가까운 지인이 대통령 아들 김현철이와 함께 저녁식사 약속을 했다며 동참을 요구했었습니다. 그 당시 저는, 군인들이 현철이를 만나려고 줄선다는 말과 함께 일부 명단도 입수하고 있었습니다. 현철이가 일부 지각없는 장군들로부터 충성 맹세 받는다는 얘기를 듣고 사실이 아니기를 바라면서도, 서약을 받는 사람이나 바치려고 찾아가는 사람들이나 모두 불쌍하고 한심한 놈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니 그 어린 놈이 장군들을 어떻게 보겠습니까? 이 수석께는 정말 미안하지만 김현철이는 나이도 어린데다 오만 방자한 놈이라서, 만날 가치도 없는 인간으로 여겼기에 물론 안 만났음을 말씀드립니다. 이런 얘기는 저의 교만이나 자만심에서 나온 말은 결코 아닙니다.”
이런 저런 얘기로 만남의 대화는 잘 진행된다는 느낌이 들었고, 나의 진솔한 얘기를 진지하게 잘 들어주는 이 수석에 대한 신뢰도 점차 깊어졌다. 그 후 대화가 한참 시간 진행되는 가운데 예상했던 대로 그의 질문이 있었다.
“혹시 최 장군께서 마음속에 생각하고 바라는 어떤 자리가 있는지 알고 싶습니다.” 그래서 나는 이미 들어 알고 있던 예상 질문이었기에 즉시 답을 했지만 의외로 순간 입을 통해서 놈이란 말이 튀어나왔다.
“죄송합니다만, 어떤 자리를 저에게 줄 ‘놈’도 없겠지만 준들 제가 받겠습니까? 만약 제가 어떤 보직을 갖게 된다면 나를 잘 아는 선후배 동료 지인들조차도 ‘최승우도 역시 충성 맹세해서 자리 하나 얻었구나!’ 하고 속으로 생각들 할 것이고 이는 저 자신이 일일이 해명할 수도 없는 명예롭지 못한 일이 될 겁니다. 결국, 스스로 불명예의 주홍글씨 꼬리표를 평생 달고 살게 된다는 저의 판단이기에 이 수석님의 말씀은 고맙습니다만 이는 저에게 만큼은 전혀 해당 안 되니 깊이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오늘 주로 제 자신 생각만을 많이 전해드렸는데 무엇보다도 시종일관 잘 경청해 주셨고 함께 저의 뜻도 잘 이해하고 받아 주시는 느낌에 진정 감사했습니다. 다시 한 번, 깊이 이해해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이 수석과 첫 만남 이후 20년이 지난 2015년 초겨울 김영삼 대통령이 서거한 후 나는 아래 글을 더 썼다.
김영삼 대통령의 서거로 지난 일을 회상해 볼 때에, 이원종 수석과의 만남은 초면이었지만 그분이 주로 내 얘기를 진지하게 청취하는 화기애애한 만찬 분위기 속에서 대화는 2시간 반을 넘기는 장시간 진행되었기에 나도 어떤 부담 없이 솔직히 얘기할 수 있었다. 그 이후 이원종 수석은 내 마음속에 ‘사귀고 싶은 사람’으로 자연스럽게 자리 잡게 되었다.
그 이후 참 아쉬웠던 일이 있었다면, ‘김영삼 대통령 임기 종료 후의 접견’은 이원종 수석을 통하면 가능할 것으로 확신했음에도 시급성을 못 느꼈고 점점 미루다가 만남의 기회를 갖지 못했고 결국 2015년 11월 22일 대통령은 서거했고 결국, 큰 아쉬움만이 이제는 남았다. 나는, 대통령이 이 수석에게 하명했던 ‘최승우 장군 만나보라’는 그 이유를 직접 대통령과의 대면을 통해 꼭 듣고 싶었다. 그래서 하고 싶은 내 말은, “우선, 오늘 뵐 수 있는 시간을 할애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대통령께서 저를 만나보라고 하명하신 이유만큼은 제가 직접 뵙고 말씀 듣고 싶어서였습니다”였다.
삼가 이원종 수석님의 명복을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