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엔=최승우 제17보병사단장·육군인사참모부장 역임, 전 예산군수] 33년 세월이 흘렀다. 필자가 사단장으로 재직했던 경기도 부천의 17사단은 100만평 부지로 사령부 영내에 아름드리 거목들이 숲을 이루고 있었다. 경관이 뛰어난

[아시아엔=최승우 제17보병사단장·육군인사참모부장 역임, 전 예산군수] 33년 세월이 흘렀다. 필자가 사단장으로 재직했던 경기도 부천의 17사단은 100만평 부지로 사령부 영내에 아름드리 거목들이 숲을 이루고 있었다. 경관이 뛰어난
오는 10월 1일은 제73회 국군의 날입니다. 한국군이 청장년기를 지나 노년의 나이에 접어들었습니다. 박정희 이후 전두환·노태우 등 군출신 대통령 30년과 이후 김영삼 이후 민간출신 대통령 30년,
오는 10월 1일은 제73회 국군의 날입니다. 한국군이 청장년기를 지나 노년의 나이에 접어들었습니다. 박정희 이후 전두환·노태우 등 군출신 대통령 30년과 이후 김영삼 이후 민간출신 대통령 30년,
[아시아엔=최승우 전 육군 17사단장, 예산군수 역임] 8년전인 2013년 7월 12일 미국 워싱턴 알링턴국립묘지를 방문했다. 나는 한국전쟁 참전용사 기념비를 찾아 제임스 밴플리트 장군과 아들 뱀플리트 주니어
“부모님의 가르침은 한마디로 계산이나 대가없이 무조건 베푸는 것이었다” [아시아엔=최승우 전 예산군수, 예비역 육군소장] 나는 20대 젊어서부터 인생 좌우명을 ‘나 자신을 알자’로 정했다. 그리고 어느새 8순을
아래 글을 쓴 최승우 예비역 장군은 1993년 4월 김영삼 정부의 군 개혁 과정에서 하나회 명단에 포함됐다는 이유로 보직해임 끝에 1995년 군복을 벗었다. 최승우 장군은 당시
[아시아엔=최승우 전 예산군수, 전 17사단장] 1986년 여름 육사 교장실. 생도대장으로 학교장께 생도에 관한 문제로 구두 보고하는 자리에 교수부장이 함께 배석해 있었다. 학교장은 과거 내가 중대장
[아시아엔=최승우 전 예산군수, 전 육사 생도대장] 1961년 초, 나는 육군사관학교 시험에 합격하고 가족과 친지들의 배웅을 뒤로 한 채 두려움 반, 기대 반 두근거리고 떨리는 마음으로
[아시아엔=최승우 전 육군인사참모부장, 전 예산군수] 지난 3월 초 철원의 한 사단을 방문했다. 내가 육사 생도대장 시절 3학년이던 후배가 어느덧 사단장이 돼 부대를 지휘하고 있었다. 30년의
[아시아엔=최승우 전 17사단장, 육군 인사참모부장, 예산군수 역임] 필자가 사단장 취임 4개월 후인 1989년 10월 노태우 대통령이 미국을 방문해 부시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마치고 귀국해서 한 말이다.
[아시아엔=최승우 전 예산군수, 전 육군본부 인사참모부장] 진정한 용기가 무엇일까? 진정한 용기는 자기에게 일어날 모든 손실을 감내할 각오 하에 외부로 발현되는 기질이라고 정의하고 싶다. 혹자는 나를
[아시아엔=최승우 전 예산군수, 예비역 소장] 1986년 1월 1일부로 영예의 장군 진급 후 첫 보직은 7사단 부사단장이었다. 당시 군사령관은 전입신고 때 나의 다음 보직을 군 인사처장으로
[아시아엔=최승우 예비역 소장, 전 예산군수] 군에서 “사단장 떴다” 하면 비상이 걸린다. 어디로 갈 것이냐? 무슨 일로 가느냐? 초미의 관심사다. 그러나 그렇게 우왕좌왕 사단장의 일정에 대해서
[아시아엔=최승우 예비역 소장, 전 예산군수] 필자가 사단장으로 재직했던 사령부 영내는 100만평 정도로 매우 넓고 아름드리 거목들이 숲을 이룰 정도로 경관이 좋았다. 그런 반면에 가을이 되어
끈끈한 정과 냉철한 분석·판단력 요구 [아시아엔=최승우 전 예산군수, 예비역 육군소장] 군인의 특성을 설명해 보라고 하면 각양각색의 답들이 나온다. “군대에는 불가능이 없다. 안되면 되게 하라. 군인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