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노병의 28년전 전역사 “군과 인간에 대한 사랑 실천한 군인으로 기억되길…”
존경하는 박정인 장군님! 제가 군 생활을 해오는 동안 여러 가지로 도와주고 또 격려해 주신 사회 각계각층 선후배 여러분!
야전에서 한 평생 젊음을 불태우며 고락을 함께 했던 군 선배와 동료, 후배 그리고 사랑하는 가족 여러분! 또 피와 살을 나누어도 아깝지 않을 만큼 서로 끈끈한 정과 믿음 속에 전우애를 나누었던 자랑스럽고 사랑했던 옛 부하 장병 여러분!
5년 전 사단장 시절, 서로 民과 軍의 울타리를 뛰어넘어 남이 아닌 바로 이웃의 한 가족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기뻐하며 뜨거운 정을 나눴던 다정한 이곳 지역주민 여러분! 오늘도 필승 번개부대의 명예와 긍지를 잃지 않고 늘 깨어있는 군인이 되고자 불철주야 노력하고 있는 사단장 이하 이곳 17사단 장병 여러분!
저는 1995년 6월 30일 부로 전역명령을 받고 오늘 이 자리에 섰습니다. 지금으로부터 30년 전 육군 소위로 임관했을 때도 저는 명령에 따라 장교가 되었습니다. 이렇듯 명령으로 시작해서 명령으로 끝나는 것이 군인의 율법이기에 저는 오늘 이 엄숙한 명령을 받들어 즐거운 마음으로 대한민국 육군을 떠나려 합니다.
그러나 이별은 영원한 헤어짐이 아니라 새로운 만남을 기약하는 씨앗이며 졸업은 모든 것의 끝냄이 아니라 또 다른 지평을 열어 가는 새로운 출발입니다. 바로 그런 점에서 저의 오늘 이 전역식은 군 생활의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신호등이며 대한민국 육군과의 영원한 결별이 아니라 또 다른 차원의 만남을 예비하는 나팔소리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저는 이 순간 마치 임관 후 첫 임지를 향해 더플백을 꾸리는 초급장교의 심정과 같이 부푼 희망을 안고 이 자리에 섰습니다. 따라서 저에게는 지금 아무런 두려움도 후회도 없을 뿐만 아니라 더 높은 계급에 오르지 못한데 대한 아쉬운 미련이나 패배의식 같은 것은 더더욱 전혀 없습니다.
저 역시 민족의 성웅 이순신 장군과 맥아더 원수를 존경했고 아프리카 밀림의 성자 슈바이처의 거룩한 인간애와 희생정신을 그토록 추앙해 마지않았던 한 소년이었습니다. 오직 국가와 인간에 대한 끊임없는 사랑을 막연히 간직했던 소년은 마침내 군인의 길을 택했고 그 후 34년 동안 오로지 한 길만을 걸어 왔습니다.
거기서 저는 국가와 함께 인간을 배웠고 참으로 강한 군대로서의 자부심과 긍지는 정과 신뢰로 뭉쳐진 조직만이 누릴 수 있다는 진리도 몸소 터득할 수 있었습니다. 또 모든 힘의 근원은 하부구조에 있고 진정한 힘은 경직된 곳이 아니라 부드러운 데서 나온다는 사실을 스스로 수없이 체험 확인했습니다.
그러므로 연약했던 이등병은 미래의 고참병으로서 올바로 길러졌을 때는 군의 보배요 힘의 원천이며, 비록 장군이라 할지라도 그들의 존재가치와 인격을 최대한 존중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교훈을 뼈저리게 느껴왔고 또 이를 몸소 실행해 왔습니다.
군대란 단지 전투에 필요한 전사들만의 수용소가 아니라 먼저 인간을 만들어 내는 제3의 교육기관이라는 사실을 일찍이 터득할 수 있게 된 것이야말로 제게는 참으로 위대한 자각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지극히 외람된 말씀이지만, 저는 2년 기간의 이곳 17사단장 재직기간 중 강군육성을 목표로, 우리 1만 2,000여명의 사단 장병들과 함께 합리적인 부대관리와 강한 교육훈련 풍토 조성을 위한 합심 노력과 함께 다음과 같은 일을 실천했습니다.
첫째, 구타와 가혹행위가 없는 상호 인격존중의 부대육성
둘째, 정과 신뢰로 뭉쳐진 부대육성
셋째, 상급자의 명령이나 지시에 대해서도 ‘왜’를 물어볼 수 있는 부대육성을 위해 합심 노력했고
넷째, 무엇보다 특히 무장탈영이나 총기사고가 두려워 병사들의 총검을 사슬로 묶어놓은 군의 현실은 ‘군대이기를 포기한 수치스런 집단이라는 평소 깨달음’ 속에서 사단장 취임 후 4개월 만에 총검 개인휴대를 생활화 했습니다.
다섯째, ‘신병교육의 지속적이고 획기적인 쇄신’으로 사단장 취임 18개월만에는 총검휴대에 이어 꽁꽁 묶여있던 실탄 그리고 수류탄까지도 드디어 과감하게 풀어서 주·야간의 해안, 강안, 주둔지 경계초소는 물론 위병소도 개인 휴대 근무할 수 있게까지 만들었으며,
여섯째, 병영 내 구타 부조리 완전 근절로 이어진 결과 軍내에서 유일하게 ‘환상의 17사단’이란 별명까지 받았기에 전 장병들이 명예와 긍지와 자부심을 간직하며 근무했습니다.
일곱째, 우리는 언제나 깨어있어 문제의식을 공감하고 공유할 수 있는 부대로 만들기 위해 더욱 합심해서 혼신의 정열을 쏟았습니다.
저의 이 같은 지휘 철학과 소신은 저 혼자만의 발명 특허가 아니라 저보다 앞서 군 생활을 했던 훌륭한 선배 전우들로부터 배운 바를 종합해 실천에 옮긴 데 지나지 않습니다.
과거는 언제나 현재에 대해 어떤 식으로든 그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과거와 전혀 무관한 현재는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이야말로 역사의 진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창군 이래 우리 군의 선배들이 남긴 역사적인 공로의 발자취는 앞으로도 잘 수용되고 접목 발전시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의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경험으로 보면 남의 허물만을 찾아 실제 이상으로 과장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정작 자기 자신의 허물에 대해서는 관대한 경향이 많았으며 그런 사람일수록 자신의 잘못과 부정은 교묘히 은폐시킨다는 사실을 알게도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부류의 사람이 우리 국가 사회의 지도적인 위치에 있거나 군의 고위 지휘관에 있다면 그로 인한 폐해야말로 심대했고, 자기만이 능력면이나 도덕면에서 완벽하고 다른 사람은 대부분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며 자기반성이 부족하고 자만심으로 충만한 그런 지휘관이라면 그 부대의 불행이요 그런 사람이 국가 사회의 지도자라면 우리 국가 사회 전체의 큰 불행입니다. 우리 모두는 그런 사람들을 경계하고 그런 사람들의 등장 진출을 막아야만 합니다.
21세기 대한민국의 군을 이끌어 나갈 젊고 패기에 찬 후배장교 여러분, 나는 여러분에게 다음 몇 가지 당부의 말을 전하고자 합니다.
첫째, 군대란 자기 인생의 황금기를 국가가 합법적으로 박탈해 가는 곳이 아니라 참된 삶의 자세와 의지를 배울 수 있는 교육의 장이라는 인식을 갖도록 하는데 최대한의 지휘 역량을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군에 대한 온갖 부정적인 평가도 알고 보면 대부분 군에 갔다 온 사람들에 의해 유포되고 확산된다는 사실은 여러분도 익히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들이 군에 있는 동안 지휘관인 여러분들이 그들을 어떻게 대했는가에 따라 평가는 천차만별로 달라질 것입니다. 그렇다고 지휘관이 원칙도 없이 그들의 인기에만 영합하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짓입니다.
둘째, 부하들에 대한 지나친 권한 행사보다는 상급자로서의 올바른 역할에, 보다 용감한 지휘관이 되어달라는 것입니다. 혹시 본의든 본의가 아니든 어떤 사안으로 인해 군 조직이 결단을 내려야 할 경우 여러분들은 자신의 직책과 직위를 걸고서라도 군을 지킬 수 있는 진정한 도덕적인 용기를 가지고 ‘정의의 길’을 선택해야만 할 것입니다.
셋째, 각별히 당부하고 싶은 말은, 지휘관으로서의 정당하고도 합리적인 부대지휘를 해 나가는 과정에서 어떤 사고가 발생했을 때 상부로부터의 문책이 두려운 나머지 자신의 신변보호를 위해 먼저 부하들을 희생시키는 과실은 결코 범하지 말아야 합니다.
넷째, 무엇이든 기존에 만들어진 것은 부정하고 생명력이 짧을 것도 예측 못하고 무조건 새로 만들어 시행해야 한다는 실적주의보다는, 지킬만한 가치가 있는 전통이나 제도는 유지 계승하고 참으로 버려야 할 규정 인습에 대해서는 과감하게 고쳐나가는 용기를 갖기 바랍니다.
끝으로, 여러분들에게 부탁하고 싶은 것은 언론은 결코 군의 적대세력이 아니며 국가안보를 위한 협조적인 동반자라는 사실을 명심하고 상호 우호적이면서도 떳떳한 관계를 유지하는 데 각별한 노력을 기울여 주기 바랍니다. 반면 언론에 비굴하거나 위압적인 자세를 취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환상이며 분별없는 무지의 소치일 뿐입니다.
사랑하는 후배장교 여러분!
사람은 누구나 배가 부를 때 배고픔을 잊게 마련이고 평화로울 때 전쟁의 비극을 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은 다른 사람들이 곤히 잠들어 있을 때 그들의 안전을 염려해야 하고 평화 무드가 이 땅을 덮고 있을 때 전쟁에 대비해야 하는 위대한 군인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전쟁이란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불합리한 것들의 종합전시장이기에 지휘관은 늘 평소에 가장 합리적이면서도 인간미 있게 부대를 지휘해야만 비로소 가장 불합리한 전투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저의 이 뜻 깊은 전역식에 참석해 주신 현역 및 예비역 장병 여러분, 본인이 사단장 재직 시절 잔뜩 겁먹은 얼굴로 군에 갓 입대한 신병들이 소정의 6주간 신병교육 수료와 함께 이등병 계급장을 달고 4박5일 휴가를 떠날 때 이곳 연병장에서 그렇게도 좋아 날뛰었던 모습들이 지금도 생생히 눈에 선하게 기억납니다. 그때 그 신병들은, 하나같이 ‘나도 무엇이든 할 수 있구나’ 하는 자신감 사명감으로 가득 차 있었고 가슴 벅찬 긍지를 느끼며 부모님 손잡고 즐겁게 부대정문을 나서는 모습들이었습니다.
내 경우, 34년 전 기본 제식훈련도 잘 모르고 군문에 들어섰던 한 청년이 어느덧 장군이 되어 마치 번개부대 신병들이 그랬던 것처럼 가슴 뿌듯한 희열과 긍지를 안고 정들었던 육군을 막 떠나려 합니다.
오늘 매우 뜻 깊은 전역식을 빛내주기 위해 불원천리 이곳까지 찾아와 주신 외빈 여러분, 그리고 나의 사랑하는 번개부대 장병여러분, 오늘 비록 여러분과 겉으로는 이별을 고하고 있지만 저는 오래도록 여러분들을 잊지 않을 것이며 그 인연은 계속될 것입니다.
이제 오랜 기간 성스럽게 입어왔던 군복을 벗으면서 여러분들의 가슴속에 다음과 같은 사람, 즉 “군과 인간에 대해 그칠 줄 모르는 사랑을 간직했고 그것을 몸소 실천하려 했던 군인”으로 기억된다면 제게는 그보다 더한 영광이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지난 34년간 어떠한 어려운 일에 부딪칠 때에도 용기와 지혜, 그리고 믿음과 소망을 주셨음을 감사드리며 앞으로 군을 떠난 후에도 명예와 중심을 잃지 않고 열심히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실 것을 확신합니다. 그리고 오늘의 이 성대한 식전을 마련해 준 사단장 이하 장병들에게 감사의 뜻을 전합니다.
여러분 모두의 건강과 행운을 진심으로 기원하면서 육군소장 최승우, 이제는 흐뭇한 마음 깊이 간직하며 떠나가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1995년 6월 30일
육군 소장 최 승 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