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승우 칼럼] 헌병대 영창, 이렇게 바꿔보니…
군대에서의 잘못은 사회에서와는 차원이 다르다. 사회에서 일어나는 범죄는 그야말로 고의적이고 계획적인 경우가 많지만 군대에서는 자신의 욕구와 불만을 이기지 못해서 순간적으로 저지르는 범죄가 많은데 주로 이성문제, 가정 문제, 병영생활의 부조리로 인한 사고가 그것들이다.
일반사회에서라면 아무런 탈 없이도 지냈을 문제들이 군에 들어오면 제한된 생활환경에 적응을 못해서 그야말로 문제로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 즉 애인의 변심, 병사들 개인의 가정사 문제, 병영 부조리 등이 그런 범주에 속한다. 상기한 문제들을 병사들이 극기하지 못해 결국 자신을 스스로 버리거나 상대에게 순간적으로 위해를 가하는 행위를 저지르게 된다.
따라서 군은 일반사회에서라면 일어나진 않을 문제가 군에 와서는 발생하게 되는 사고에 대해 단순히 본인의 탓으로만 돌릴 것이 아니라 어떤 도의적인 책임을 느껴야한다는 주장을 나는 해왔다. 물론 이런 문제에 대해서 군은 전통적으로 부대 지휘관 나름대로 부단히 노력을 해왔고 많은 개선을 해왔으며 그래서 나름대로 발전을 이룩했다고 생각한다.
교육의 본질은 주입이나 답을 알려주는 것이라기보다 올바른 답을 낼 수 있는 문제 제기에 있다고 본다. 군의 특성상 이유 없고 무조건적인 일방적인 강요 방식의 요구가 많이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렇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합리성을 잃지 않아야 하는데 일방적인 지시와 복종만 있으니 경직되기 쉽고 잘못되면 로봇화 되기 십상이다. 그러다 보면 개인에 따라서는 인간 본연의 고귀한 본성이 파괴될 수도 있는 환경을 맞게 된다.
훌륭한 지휘관을 만나면 전혀 문제없이 성공적인 생활을 영위하지만 그렇지 못하면 본의 아닌 잘못된 방향으로 나가게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우리 군의 젊은이들이 그동안 이성문제로 부대를 무단이탈하는 일들이나, 힘없는 후배들을 괴롭히는 고참병과 이에 반발하는 후임병의 병영 내 각종사고, 가정문제로 고민하던 병사의 부대이탈 등이 우리 군에는 많았던 것이 사실이다. 이런 경우 그에 대한 징계로 사고를 일으킨 젊은 병사들을 헌병대 영창에 구금하는 단순 처벌에서부터 군법회의에 회부되기 전 대기하는 동안에 헌병대 영창에 구금되는 일들이 있다.
거기에 구금되는 젊은이들 모두는 각 가정에서는 말 할 수 없이 귀한 자식들이며 장차 우리 사회의 일꾼들일 텐데 구금되는 순간 본인들은 군에서의 잘못 때문에 자신이 사회에서 영원한 낙오자로 전락한다는 절망적인 생각에서 자기 인생에 대한 강한 의지를 버리고마는 단순한 현상을 보편적으로 보이고 있다. 군대의 어느 조직에서든지 그들 사고 병들에게 징계는 행위에 대한 처벌이지 인간에 대한 처벌이 아님을 강하게 인식시켜 주어야하는데 그것이 부족했던 것이 현실이었다.
그래서 나는 군법은 처벌기능보다 보호기능에 우선을 두어야 한다고 주장을 했고 그것을 실천하도록 많은 노력도 했다.
이러한 평소의 의식을 바탕으로 처음 사단장에 부임하여 헌병대 순시를 했는데 역시나 우리 부대도 과거와 다른 점이 별로 없음을 느꼈다. 구금된 병사들은 자신을 죄인으로 스스로도 인정하지만 헌병들로부터도 그렇게 취급 당했다. 사단장 부임 초기부터 내 뜻대로 진행한다면 자칫 부작용이 우려되어서 지휘관에 대한 신뢰 속에서 동화되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영창 문제에 대한 장기전략을 구상했다. 병사들과도 어느 정도 호흡이 맞기 시작하는 수개월이 지난 후 드디어 헌병대 영창 개선 작업에 들어갔다.
황량한 사막에서 자란 사람과 공기 맑고 물 좋은 산속에서 지내는 사람과의 성격은 생활환경 영향으로 많이 다르다. 비록 수일 내지 수주 간이라도 사방이 우중충한 회색 벽의 제한된 좁은 공간에서 24시간 보내는 사람의 마음이 밝을 리가 없다. 그리고 처벌에 대한 두려움이 항상 마음을 지배하는데 불빛마저 침침하고 생활자체가 수도자가 아닌 이상 ‘면벽수행’은 구금된 병사들에게는 고문 그 이상일 수 있다.
영창 안에 읽을거리라고는 하나도 없고 불필요한 암기사항은 왜 그렇게 많은지 그러지 않아도 복잡해서 터질 것 같은 머리로 외워지지 않는 내용들을 머리 터지도록 외워야만 하고 항상 곧게 앉아서 면벽 수도를 해야만 하는 환경은 그 자체가 견디기 힘든 고문 이었을 것이다.
나는 우선 우중충한 영창 내부의 도색을 밝고 환하게 칠하도록 했다. 그리고 영창 밖에 설치된 희미한 형광등을 영창 내부에 환하게 설치하도록 하고 좋은 책을 준비해서 독서대를 마련했으며 개인당 조그만 책상(30×40×30cm 정도 크기)도 준비했다. 보통 침상에 엎드려 편지를 쓰게 되는데 침상 자체가 울퉁불퉁하여 글씨를 쓸 수 없어 몹시 불편하다. 판판한 베니야판으로 만든 단순한 조그만 상을 개인용 책상으로 바꾸어 편지도 쓰고 책도 읽는데 도움을 주었다.
강요해서라도 책을 읽고 독후감을 쓰게 함이 인성교육에 가장 효과 있다고 생각을 했다. 그렇게 하니까 헌병대장은 사단장인 나에게 “큰 일 납니다”라며 건의해 왔다. 그의 건의 내용인즉 형광등을 영창 안에 설치하면 자해사고 등으로 큰 문제가 생길 위험이 있으며 영창 규정에도 위배된다는 얘기였다.
그러나 나는 사단장이 결과에 대한 책임을 질 것이니 헌병대장은 염려 말고 준비, 시행하라고 지시했다. 당시 영창 재소자는 보통 10명 정도였기 때문에 책상도 10개 정도면 되었다. 아울러 영창 재소자들의 일과를 정적인 일과에서 동적인 일과로 개선했다. 알맞은 체력단련, 목욕, 신문읽기, 독서와 독후감쓰기, 편지쓰기, 토론, 이러한 시간을 부여해서 그들을 교육했다.
가끔 사단장인 나의 가족을 비롯해서 사단 간부 부인들로 하여금 영창을 방문하여 고기를 같이 구어먹도록 했다. 구금된 병사들은 모두 자식 또래의 나이였기 때문에 사랑의 봉사를 통해 그들에게 어머니를 대리한 손길을 통해 기쁨을 맛보게 해주었다.
잠시 본의 아닌 잘못에 대한 벌을 받고 나가서 군 생활 잘하고 사회생활 잘해야 한다는 의식을 심어 주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중 몇 명의 병사로부터 옥중 서신도 여러 통 받아 보아 노력한 보람을 경험하기도 했다.
무엇보다 그들의 마음속에 좌절감을 최소화 하도록 했고 인생에 대한 긍정적인 생각을 심어주는데 노력을 기울였다. 단지 본의가 아닌 순간적인 잘못에 대한 처벌은 달게 받고 한번 다시 새로운 삶을 시작해야 한다는 강한 의지를 심어주는데 기여했다고 자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