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승우의 시선] 북한산 수리부엉이의 보은…산사태 큰 피해 막아
[아시아엔=최승우 전 육군 17사단장, 예산군수 역임] 수리부엉이를 살려준 1년 후 1984년 어느 여름날, 갑작스레 엄청난 폭우가 내렸다. 당시 매일 저녁 적의 예상 침투 접근로 지역에 1개 소대가 야간매복 작전을 나갔다가 임무를 마치고 새벽녘에 복귀 후 막사에서 취침을 하였다. 그런데 폭우로 인한 큰 산사태가 덮쳐서 소초막사를 완전히 휩쓸어 버렸다는 내용의 무전 보고를 받게 됐다.
연대장인 나도 개천 범람으로 전혀 이동할 수 없어 숙소 공관에 머물러 있어야 했다. 그런 와중에 무전으로 전해진 사고 보고였고, 당시 모든 계곡의 작은 길에 물이 넘쳐 인명구조 특수임무 요원의 접근도 전혀 할 수가 없었다. 그야말로 속수무책이었다.
최악의 경우 소대원 전원이 사망할 수도 있었다. 유무선 보고만 받고 어떤 조치도 못하고 있으려니 순간마다 마음이 너무도 무겁기만 했다. 중간 무선보고는 다행히 매복 복귀병력이 완전 취침하기 직전에 사고를 당했고 소초막사가 완전히 휩쓸리지 않고 절반정도만 소실되었으며 소대 자체 인명구조 활동을 하고 있다는 보고였다. 그 소초는 완전 고립되어 접근이 불가능했다.
당시 산에 오르는 길은 계곡을 따라 형성된 소로 길이었는데 모두 수로가 형성되어 접근은 물론 환자 후송조차 할 수가 없었다. 무선 통신으로 연락을 유지하는 방법만이 유일했다. 그런 와중에 기쁜 소식이 전해졌다. 반 토막도 안남은 막사 안에서 생존을 위한 사투 끝에 분대장만 크게 부상을 당해 생명이 위험하고, 나머지 소대원들은 생명에 지장이 없을 정도로 모두 무사하다는 보고였다. 모든 접근로나 퇴로가 차단되어 당장 분대장을 후송할 수 없었던 상항이 안타까웠다.
무리한 행동은 더 큰 사고로 이어질 수 있어, 결국 소대원들은 분대장의 사망을 현장에서 지켜봐야만 했다. 이 사고로 숨진 사람은 불행 중 다행히 분대장에 그쳤다. 만약에 평소대로 매복 복귀 후에 자기 자리에서 취침을 했더라면, 그리고 매복 복귀 후의 취침 준비 중이 아닌 깊이 잠든 상태에서 산사태가 발생했더라면 소대원 절반 이상이 흙더미에 묻혀 사라질 뻔했다.
그 후 현장에 도착해 확인해 보니 산사태는 소초막사를 정통으로 통과하며 발생했다. 그런데 소초막사 전방 10미터 이내에 약간 돌출한 바위가 있었다. 이 바위는 실제는 땅속 깊은 곳에서 형성된 거대한 암벽바위였다. 당시 산사태로 내려오던 엄청난 흙더미가 소초 전방의 돌출된 바위에 부딪혀서 방향이 바뀌어 소초 절반만 삼켜버리고 내려갔던 것이다.
병사들은 그날 따라 한쪽으로 몰려 취침했는데 다른 한쪽으로 몰려 잤더라면 소대 전원 모두 사망했을지도 모른다. 기적 중에도 이런 기적이 있을까하는 생각이었다.
나는 1972년 여름 중대장으로 수경사 근무 시 북악산 스카이웨이 계곡에서 엄청난 산사태를 경험한 적이 있었다. 단층 2층 집들을 흔적도 없이 삼켜버린 현장을 목격했다. 화재사고는 흔적을 남긴다지만 수해는 흔적도 안남기고 훑어버린다는 사실을 직접 목격했다.
사패산 산사태가 소초와 병사들을 흔적도 없이 삼켜버릴 수도 있었는데 땅속의 조그만 바위산에서 방향이 전환되어 귀중한 생명들을 살렸다는 기적 이상의 이 사실을 무엇으로 설명해야만 할지 몰랐다. 당시에는 그저 하나님께 감사했을 따름이었다.
그 후 산사태 사고를 생각할 때마다 산사태 1년 전에 목숨을 살렸던 북한산 수리부엉이를 동시에 회상하곤 했다. 당시 연대장 공관 잔디밭에서 부엉이와 첫 대면 때 내가 알 수 없던 까치들의 데모, 그리고 ‘북한한 산신령’이란 내 뒤에서 들려왔던 수근 대던 목소리가 함께 어울려서 아직도 생생하게 내 눈과 귀속에 남아있다.
우리가 북한산 수리부엉이에 대한 선행을 했기에 이에 대한 보답으로 많은 부하 병사들의 귀중한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는 ‘확신’을 마음속 깊이 두고두고 간직하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