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행인 칼럼] 육정수 선배, 따스한 그 뜻, 그 마음 거기서 꼭 펼치소서

2007년 추석날 형제 가족들과 독립문 공원에서.

[아시아엔=이상기 기자] 존경하는 육정수 선배, 선배께서 이곳을 떠난 지 보름이 지났군요. 선배와 마지막 만난 것이 언제인지 가물가물하지만 아마도 선배가 병상에 눕기 얼마 전 민병돈 장군과 인사동에서였을 겁니다.

그것도 5년이 흘렀고, 그 얼마 뒤 선배가 의식을 잃었다는 소식을 최승우 장군 통해 전해들었지요. 그리고 보니 선배와 저 사이에 두분의 장군이 계시는군요. 두분 다 군 안팎의 후배들로부터 존경받으며 자상하면서도 군인 본분에 충실하신 분이었지요, 마치 선배처럼.

지난 1일 조간신문에서 형님 부음을 접하고 안암동 고려대병원 장례식장으로 가면서 선배와의 인연을 되짚어봤습니다. 형님과 내가 대면해서 만난 것은 2002년 3월 제가 한국기자협회장으로 이달의 기자상 심사위원 인선 때였지만, 실은 1993년 2월 국방부기자실에서 선배를 만났지요. 출입처가 바뀌어 국방부로 나가니 기사 스크랩북이 있더군요. 지금도 그렇겠지만, 당시는 출입처가 바뀌면 분위기 익히는데는 스크랩이 최고참고서였지요. 거기서 육 선배가 쓴 ‘주한미군’ 시리즈를 발견했어요. ‘와, 맞다. 이런 기사를 써야겠구나’ 하곤 몇 개 복사도 해놓았었지요. (하지만, 그해는 김영삼 정부 들어 잇단 군개혁 조치로 스트레이트 기사 발굴하기에도 바빠 기획기사를 준비하기엔 역부족이었지요)

주왕산에서 동아일보 사회부 시절 함께 근무했던 동료들과. 왼쪽부터 양영채, 권순택, 오명철, 육정수 기자.

세월이 흘러 2002년 3월, 사실 저는 동아일보에서 92년 민자당 출입 때부터 알던 S선배를 심사위원으로 생각했어요. 그런데, 두어번 연락을 했지만(그땐 핸드폰이 아직 없었던 때였지요!) 닿지 않았습니다. 그때 불현 듯 선배가 떠올랐던 겁니다. 그리고 그후 제 임기 두 번 동안 4년간 정말 열심히, 정확히 기자상 심사를 해주셨지요.선배와는 이후에도 연 2~3회는 식사자리를 같이 했죠? 헌법재판소 대변인 할 때는 아시아엔 박소혜 초대 편집장과 저를 불러 점심을 사셨죠. 그때 주신 헌재 볼펜을 7년 가량 지녔었어요. 재작년 중국 출신의 국내 언론사 기자가 탐내 넘겨줬는데, 그도 선배 생각하며 잘 쓰고 있다고 합니다.

2011년 11월 아시아엔 창간 때도 내 일처럼 도와주신 선배는 2013년 여름 매거진 N 창간 얼마 뒤 편집위원을 맡아, 제게 소중한 자문도 아끼지 않으셨지요. 어느 늦가을엔가 자동차 이동 중 공항에서 시작된 통화가 집 도착때까지 계속 이어진 적이 있었지요. 1시간 반 정도 선배와 저는 죽이 잘 맞았던 거지요. 우리의 화제는 주로 군대, 언론, 기자사회, 법조계 등이었는데, 제가 궁금한 것 던지면 선배가 답하는 식이었지요. 헌재 대변인 시절, 형수의 병 구완에 온힘을 쏟은 선배가 하루는 “집사람이 많이 좋아졌어” 하면서 그렇게 좋아하셨지요.

어느 겨울날 설악산 공룡능선 등산 중

그런데 나중 들으니 형님이 병상에 눕게 됐다는 소식을 들었지요. 형님, 그리고 지난 1일 이승에서 마지막 배웅을 하게 되다니요. 장례식장에서 남찬순, 장병수 선배를 만나 저와 형님 인연 털어놨지요. 스크랩에서 만나서 30년 가까이 줄곧 멘토였다고. 그날 초면인 장 선배가 박종철 사건 당시 동아일보 시경캡이었더군요. 장 선배가 재생한 1987년 1월의 상황이 엊그제 일처럼 그려지며, 기자 이상기가 뭘 해야 할지 생각케 하더군요. 형님은 떠나면서 또 한 분의 선배를 소개해주신 거였어요. 형님이 돌아가신 며칠 뒤가 정구종 선배 생신이었어요. 면식이 없지만 이따금 카톡 친구인 정 선배와 주고 받은 문자로 형님께 전하는 안부를 줄이렵니다.

“존경하는 정구종 선배님 엊그제 생신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여지껏 최선 다해 멋지게 살아내셨으니 앞날도 더 힘차고 보람 있으리라 믿습니다. 지난 1일 육정수 선배 조문 갔다가 박종철 사건 당시 캡이던 장병수 선배 만나 선배님과 동아일보의 역할을 들었습니다. 선배님이 사회부장 시절이었다지요. 저는 그때 동아일보 애독자였지요.”

“이상기 기자 귀하. 나의 생일 축하 메시지를 보내 주시어 대단히 감사합니다. 나도 육정수 군의 조문을 갔었는데 너무 일찍 작고하여 아깝군요. 장병수, 육정수 두분 모두 나의 사회부장 시절에 시경 캡을 맡아서 고생들 많이 했는데 그 고생 덕분에 87년 민주화의 새벽을 여는데 동아일보가 앞장설 수 있었어요.”

2012년 여름 인제 곰배령에서.

육정수 선배, 이제 그곳에서도 멋진 신문쟁이로 여전히 기사 거리 찾고 계시겠지요? 맞아요, 근데 거기선 ‘배드 뉴스’ 대신 ‘굿 뉴스’ 많이 많이 쓰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그토록 쓰고 싶어하던 뉴스, ‘굿뉴스’ 말이죠. 정수 형님 그럼 다시 만날 때까지… 

Leave a Repl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