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묵적인 군대폭력 그 후 40년, 부끄러운 자화상
세상의 어리석은 민낯에 대하여
[아시아엔=윤상준 자유기고가] 필자는 복무기간이 30개월이던 시기인 1980년대 초반, 20대 초반 나이에 군복무를 했다. 당시 대학교 재학 중 2년간 교련수업을 이수하면 3개월의 복무단축 혜택이 있었다.
학기 중 자원입대를 신청하여 한여름이던 7월 논산훈련소에 입소했다. 그 해 여름 날씨가 무척 더워 낮에 1시간의 낮잠 시간도 있었는데 군사훈련도 처음이고 긴장해서 그런지 훈련을 마칠 때쯤 무려 체중 5kg이 빠져 65kg이 되었다. 피골 상접까지는 아니어도 ‘호올~쭉’하게 되어 훈련소를 나왔다.
그리고 155mm 구경 ‘견인포 대대’에 배속되었는데, 해당 포대(포병대대)는 통일로의 호랑이라고 자칭(?)하던 탱크 여단인 2기갑여단 소속이었다. 우리 포대는 여단과 떨어져서 전방에서 수 km밖에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FEBA(Forward Edge of Battle Area)에 위치해 있었다. FEBA를 우리말로 전투지역전단(戰鬪地域前端)이라고 표현하는데 말 그대로 전단(前端), 즉 휴전선 앞 끄트머리에서 한 발짝만 물러나 있다는 뜻이다. GP, GOP 등 접적 지역 경계 사단들의 후방 베이스, 예비사단, 동원사단 등이 있는 곳으로 전쟁 발발시 최전선에서 일반 땅개들(보병의 속칭)이 버티도록 화력지원을 하는 임무를 지닌다.
지금은 그런 전후방 개념이 사라진 디지털 군 시대이고 그래서 전쟁 발발시 모든 곳이 최전선이 되겠지만 당시에는 전쟁이 발발하여 휴전선을 넘어오는 ‘부카니스탄(북한)’ 적군을 향하여 쉼 없이 포탄을 날려야 하고 적의 포탄 공격을 받는 지역이라서 철책선 근무에 버금가는 위험지역이다. 물론 휴전선 건너 FEBA 지역의 ‘부카니스탄(북한)’ 포병들도 동일하게 우리들의 포탄 공격 타겟이 된다.
이 글에 첨부한 사진들은 제대를 얼마 남겨놓지 않았던 병장 말년 즈음, 부대 여기저기에서, 이런저런 경우에 찍은 사진이다. 얼마 전 서재에서 앨범 정리하다가 눈에 띄어 핸드폰으로 찍었다. 군 시절의 아름다운 추억 남기기? 당연히 그런 것은 일절 없다.
군 복무를 해본 이들 중 생각 있는 이는 알겠지만, 군대에서 수 없이 불렀던 ‘팔도사나이’란 군가가 가치 없는 단어와 개념을 담고 있듯이 말이다. 젊은 청년들의 꽃다운 나이 징집제 군복무란 원치 않는 본능을 억압당하고 ‘강제를 강제하는’ 독재사회의 축소판 같은 것에 불과한 것이다.
그래도 태어난 땅의 역사적 상황이 비극적 분단이라서 대부분의 20대 청년들이 ‘그냥(?)’ 의무적으로 군 복무를 한다. 직업으로서 군인을 선택하는 것과는 전혀 성격이 다르다.
모두들 강제적 상황에 몰려 있으면서도 인습적으로 이어져 내려오던 부대 내 억압과 구타와 잔혹행위 등 일그러진 인간 욕망의 본능적 믹스가 한국의 의무 군복무라는 것이다. 스스로 택한 직업군인들, 즉 타국의 전쟁에 가서 서로 죽고 죽이다 간신히 살아 돌아온 이들 중에서도 적지 않은 퇴역군인들이 그 전쟁의 참혹한 기억으로 고통 받고 있지 않은가. 세계 어디를 가더라도 인간은 다 똑같다. 인류 평균 3~4% 정도의 비율로 존재하는 사이코패스 같은 존재들을 제외한다면 말이다.
바로 위 사진과 그 앞에 첨부한 구타 사진들은 불가의 ‘육도윤회’(六道輪廻)의 굴레 중 ‘지옥도’(地獄道)의 ‘실사판 픽션’(?) 같은 것이라고나 할까? 군대에서는 웃고 있어도 웃고 있는 것이 아닌 것이 군에서 제대하고 적어도 10년 이내에는 거의 누구나 예외 없이 군 복무를 마쳤는데도 다시 군대에 가서 생활하는 그런 식의 악몽을 꾼다. 그러면서도 군 생활의 무용담을 사회의 술자리에서 떠든다. 그런 것은 수컷들의 치졸한 블러핑에 불과하다.
그래서 이 글을 쓰면서 붙이는 군 생활의 편린 사진 몇 장, 즉 군 동기들끼리 연출한 ‘구타의 기억’ 사진들은 ‘희비극’ 군생활의 박제에 불과하다. “삶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요,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던가? 한 시절 세상의 어리석음을 ‘웃기다 자빠진’ 찰리 채플린의 말이다. 개인적으로 그의 어릴 적 성장기 경험을 내포하고 있는 표현이겠다만…
국가끼리 나뉘고 분열하여 서로를 적대시하는 인간 본성의 근원을 적나라하게 지적하는 교육을 하지 않으면서, 우연히 태어난 국가를 사랑하고 전우애를 부추긴다고? 그 구타와 억압이 존재하는 부대 안에서 전우애를 강제하는 ‘팔도사나이’라는 노래를 부른다고? 누가 면회 오면 “빌려 달라”는 명목으로 돈을 삥 뜯던 고참들, 억압된 병영에 단지 먼저 왔다는 이유로 ‘졸병’들을 수시로 집합시켜서 쇠몽둥이로, 야구 방망이로, 각목으로, 주먹으로 엉덩이와 가슴 등을 수시로 패던 그 야만의 시기와 장소에서? 자칫 잘못했으면 집단난투 살인극의 주도자가 되어 사형당하거나 무기징역 범죄자 될 뻔한 그 군대라는 곳에서?
지금은 당시와 유사한 행위가 사실상 없다지만, 소위 학창시절의 따돌림 같은 연장선상의 문제는 현대 군대에서도 상존한다. 신성한 국방의 의무(?)로 회칠한 징집병제와, 정신적으로 일그러진 독재적 정치 욕망을 타인의 죽음으로 치환하는 전쟁이라는 것은 스스로 죽거나 살 권리를 박탈당하는 인간 존엄의 말살행위지만,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소위 지성인들(?)에게 고뇌의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머니게임에만 치달아서 그런가?
필자가 당시 군생활을 통하여 얻은 사실은 당시도 지금도 국방의무를 이행치 않은 채 정치·행정·사법 및 경제적인 권력과 명령의 정점에 있는 사람들이 돈과 자본과 권력적 망상의 사주로 야기될 전쟁의 참혹한 비극의 무덤에 회칠을 하는 것은, 그 참혹한 비인간적 살육을 목적으로 하는 군 생활에서 철학적인 교훈을 얻지 못하다가 군사적 지휘명령 체계의 첨단에 앉게 되는, 소위 사이코패스 전쟁광들의 정신질환적 그 것과 다를 바 없이 위험하다는 것이다. 2022년판 영화 <서부전선 이상 없다>의 마지막 장면처럼 말이다.
우리들이 인간의 기본을 지키지 못하여 짐승이나 좀비 같은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은 순식간이다. 이른바 ‘슬기롭고 슬기로운’ 인간, 즉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라고 불릴 만한 ‘인간’의 품성을 지키다가 궁극에 ‘사람’으로 완성되어 죽고자 하는 과정은 도저히 헤아릴 수 없는 방해물을 제거하기 위한 무수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인간 본연의 슬기로움을 자극하는 방식으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