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행인 칼럼] “현장에서 찾아낸 ‘한 줄의 진실’이 신문윤리의 최종 목표”
이 칼럼은 한국신문윤리위원회 독자불만처리위원인 필자가 한국신문윤리위원회에서 월간으로 발행하는 <신문윤리> 제294호(2024년 9월호)에 기고한 글입니다 <편집자>
S후배, 추석 연휴께까지도 무더웠던 2024년 여름은 일부 지방을 빼고는 변변한 태풍 한번 없이 떠나 갔네. 폭염 절정이던 지난 8월 초 자네와 통화에서 다른 얘기 끝에 후배가 “신문윤리위원회의 자살보도 관련 제재가 너무 엄격하여 일선기자들의 불만이 있다”고 했지? 기사 제목은 물론 본문에 ‘자살’이나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혹은 자살이라고 추정될 수 있는 표현이 담기면 자살보도 위반으로 제재하고 있지. 게다가 2024년 4월부터는 그동안 자살 대신 써온 ‘극단선택’이란 표현도 제재를 하고 있다네. 그러니 현장기자나 데스크들 불만이 나오는 것은 당연한 것일지도 모르겠네.
자네는 이에 자살이나 극단선택 말고 무슨 표현을 쓰면 제재를 피해갈 수 있냐고 물었고, 나는 적절한 답을 하지 못했던 기억이 나네. 자살이나 극단선택을 대체할 단어를 찾는 것은 앞으로도 오랫동안 ‘현재진행형’이 되지 않을까 생각하네.
물론 내가 갖고 있는 정답 아닌 해답은 자살한 사건의 보도를 최소화하는 것이라고 보네. 공인이나 저명인사 등 그의 죽음을 보도할 가치가 있는 경우에도 자살의 경우 극히 제한하는 것이 나는 맞다고 보는 입장이라네. 정확한 통계는 찾지 못했지만, 심리학자나 상담학자들 말을 빌리거나 경험칙으로 보면 자살보도가 유족과 지인들에게 미치는 영향이 非자살의 경우보다 훨씬 심각하다는 것을 알 수 있지. 또 자살보도는 모방심리를 불러일으키는 것은 이미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굳이 인용하지 않더라도 잘 알려진 것 아닌가 하네.
S후배, 나는 지난 1년 반 한국신문윤리위원회 윤리위원 겸 독자불만처리위원을 하면서 안타까운 게 몇 있어. 우리 기자들이 조금만 신경 쓰면 될 것을 놓치고 있기 때문이야. 매달 제재를 받는 기사들은 온·오프라인을 망라해 자살보도 외에 대부분 △선정보도 금지 및 유해환경으로부터의 보호 △피의자 및 피해자의 명예존중 △사회적 약자 보호 △선거여론조사 보도준칙 △타언론사 보도 등의 표절 금지 등의 범주에 속한다네. 월 평균 300건을 넘는다네.
그런데 이 가운데 2/3 이상은 신문윤리위원회가 정한 윤리강령과 보도준칙을 한두 번만 읽어도 제재 받지 않고 넘어갈 수 있는 것들이라네. 가령 선정보도와 유해환경 조항의 경우 칼이나 도끼 등 흉기, 주먹질, 흡연, 음주 혹은 술병 등이 담긴 이미지는 모두 제재를 한다네. 또 매월 수십 건에 이르는 여론조사의 경우도 오차범위 안에 있을 경우는 순위를 매겨서 보도하면 100% 제재하고 있다네. 그 이유는 여론을 왜곡시킬 우려가 있기 때문이지. 타언론사 보도 등의 표절 금지 항목의 경우 이 역시 매달 10~20건에 달하는데, 남의 기사를 그대로 쓰면서도 출처를 밝히지 않는 것은 자존심인지 무신경인지 딱하기만 하다네.
‘사회적 약자 보호’와 관련해서는 심의 때 가장 많이 쟁점이 되고 심층 토론도 벌이고 있는 대목이지. 가령 ‘벙어리’ ‘눈 먼’ 등 신체를 폄하하는 것은 예외없이 제재를 하고 있다네. 최근 들어 식당 여종업원을 ‘이모’라고 하거나 ‘탈북민’ ‘푸른 눈’ 등에서처럼 특정신분이나 출신들에 대해 오해를 불러일으킬 만한 단어 사용에 대해서도 제재를 가하고 있다네. 이에 대해 위원들 간에 논란도 있지만, 전향적으로 제재를 확대하는 추세라네.
S후배, 그대와 내가 처음 만난 게 2000년 6월, 24년이 넘었네. 그해 9월 중순 어느 날 아침 9시 조금 넘은 시각 군산 대명동 집창촌 화재로 20대 여성 5명이 숨진 사건이 있었지. 그때 후배와 전주의 P후배가 2주일 동안 현장에서 하리꼬미(이 표현 역시 윤리위에선 표준어 사용 항목에 위배되어 제재대상일세^^) 하던 것과 그대들에게 기사를 닥달하던 기억이 어제 일 같네 그려. 그대들의 분투 덕분에 그후 그 사건을 시작으로 유사 사건에 대해 입법을 통해 국가가 손해배상을 하게 됐지. 그해 말 그대들을 63빌딩에서 열린 앰네스티 인권상 시상식에서 만난 기쁨이란…
당시 사건과 후배들의 고생한 얘기를 굳이 소환한 것은 진정한 신문 혹은 기자들의 최고 덕목은 바로 기자의 덕목이 뭔가 하는 생각 때문이라네. 그러한 기준 혹은 덕목이 있었기에 현장으로 달려가 취재하고 그 사실을 독자에게 알릴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S후배, 그런데 말일세. 그게 요즘 쉽지 않을 것 같다는 우려는 나만 하는 것일까 하고 생각해 보곤 한다네. 매월 300-400건에 이르는 신문윤리위에 의한 윤리 위반 제재 기사들이 실상은 독자들의 클릭을 유도하기 위한 것이라는 생각에서 그렇다네.
그런데 말이야. 나의 걱정은 하나 더 있다네. 주로 정치기사에서 볼 수 있는 ‘아니면 말고’식 가짜뉴스 또한 윤리위의 제재 넘어 횡행, 난무하고 있으니 이 또한 지난 여름 폭염만큼이나 나와 후배, 그리고 독자, 나아가 국민들을 짜증 나게 했으니 말일세.
S후배, 그래도 어쩌겠나? 우리 기자들이 해결사로 나서서 끝장 볼 때까지 나설 수밖에 없음을. 그것이 우리 기자들의 운명이자 사명 아니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