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모] ‘영원한 산사람’ 홍옥선 엄홍길휴먼재단 사무처장
지난 2일 낮 아주 익숙한 이름이 문자로 왔어요. 그게 옥선 형의 비보인 것을 알고 지하철에 있던 저는 먹먹하기만 했어요. 믿을 수가 없었지요. 아니 믿고 싶지 않았어요. 잠시 후 엄홍길 대장과 통화가 됐어요. “어저께 산에 가셨다가, 산악회 사람들 하고···. 암벽 등반하시다가 줄이 풀리면서 추락하셔서···,” 밤 9시 다 된 시각, 의정부 을지대학병원 장례식장에서 형은 인자하게 나를 맞아주었어요. 그런데 그 미소가 저를 더 힘들게 하더군요. 빈소는 전국 각지의 선후배들이 자리를 메웠더군요. 평소 따스한 형과의 마지막 작별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지 그들 얼굴에, 혹은 술잔에 드리워 있었지요.
지난 1월 20일 엄 대장 모친상가에서 만날 때, 자리를 옮겨다니며 후배 엄 대장 조문객들에게 일일이 인사하던 모습이 선한데 말입니다. 산에서는 누구보다 엄하지만, 산을 내려와서는 그렇게 자애로운 옥선 형. 영정 속 형의 온화한 얼굴을 보면서, 작년 8월 장대비가 쏟아지던 날, 우이동산악문화H·U·B를 찾은 김상윤 아시아기자협회 인턴에게 등산 장비와 동작 등 하나하나 설명해주던 모습이 떠올라, 울컥하고 말았지요.
옥선 형, 우리가 만난 게 근 20년이 됐지만, 산에 동행한 적은 없어요. 하지만, 2008년 엄홍길휴먼재단 창립 때 형은 사무처장으로, 이상기는 감사로 10년간 맘 맞췄던 인연이 너무 소중하기만 합니다. 그 사이 딱 한번 긴장관계에 있던 때가 있었지요. 2016년께, 당일 결재하던 예년과 달리 “보고서 놓고 가시면 제가 검토 후 연락드리지요” 한 적이 있었지요. 그리고 이틀 뒤 몇가지 지적사항과 함께 전했더니 되레 “너무 고맙습니다. 우리가 개선할 건 개선하고 넘어가야죠” 하고 좋아하던 모습이 지금도 선합니다.
옥선 형과의 추억은 대부분 재단과 엄홍길 대장에 관한 거였지요. 형의 엄 대장 사랑은 질투가 날 정도였습니다. “엄 대장이 목숨 걸고 히말라야 다니며 만든 재단, 이 감사도 잘 지켜달라”고 말하곤 했죠. 저 역시 꼭 같은 생각이었지요. 자칫 엄 대장 이름에 흠이 갈까, 노심초사하던 것도 말이죠.
벌써 보고 싶은 홍옥선 형님.
발인을 앞둔 그제 밤 빈소에선 형을 추억하는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오더군요. 2013년 강북구희망원정대 설립 때 실무책임을 맡아 옥선 형 하고 호흡을 맞춘 황재경 강북구청 전 과장과, 한국등산학교에서 형한테 암벽 등반을 배웠다는 김창기 조선일보 전 편집국장 등이 전한 얘기예요.
“황정민 배우가 엄 대장 역을 맡은 영화 <히말라야> 찍기 전에 주·조연 배우들이 다 와서 홍옥선 처장님한테 지도받고 그랬지요. 산악학교도 홍 처장 아니었으면 어림도 없었을 겁니다.”
“매달 적어도 두번은 인수봉에 올랐어요. 최소한 500번은 될 겁니다. 근데 그 얘기 들은 게 7-8년 전이니 최근까지 하면 700번은 될 걸요.”
“교감선생님(형을 그렇게 부르더군요)한테 등산학교 졸업생들을 얼마나 자랑스러워 하셨는데…계속 연락하면서 기수별로 만나는 걸 그렇게 좋아하셨는데…”
옥선 형한테 “줄 잡으러 갈까?”는 산에 가자는 뜻이었다는 것도 알았지요.
너무나 인간적인, 너무나 산을 좋아했던 옥선 형. 형은 히말라야 그 먼곳 대신 양주 땅 불곡산에서 산 사나이의 최후를 마치셨네요. 산이 좋아 그곳에 가는 ‘보통 산악인’의 벗으로 남아 그들을 지켜주라는 하늘의 뜻이 아닌가도 생각했습니다.
존경하는 홍옥선 형님, 회자정리 이자필반(會者定離 去者必返). 형은 지금 우리 곁을 떠났지만, 다시 만날 것을 알기에 슬픔을 억누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재회의 그날, 형의 환한 미소 떠올리며…
2023년 4월 4일
이상기 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