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악인 엄홍길 한-네팔 수교 50주년 기념 히말라야 미답봉 ‘쥬갈’ 등정
[아시아엔=정병선 <조선일보> 기자] 한국-네팔 수교 50주년 기념 히말라야 원정에 나선 ‘한국-네팔 우정 원정대 2024′가 히말라야 미답봉 등정에 성공했다. 산악인 엄홍길(64) 대장이 이끄는 원정대는 3일 오후 6시55분(현지시각 오후 3시40분) 쥬갈 히말라야 정상을 밟았다고 위성전화로 전해왔다.
엄홍길휴먼재단(UHF), 대한산악구조협회(KARA·회장 노익상), 네팔등산협회(NMA) 연합으로 구성된 한국-네팔 원정대는 기상 이변과 매일 불어닥친 눈폭풍과 눈사태, 낙빙(落?) 등 갖은 시련 속에서도 인내와 도전정신을 바탕으로 등정에 성공, 한국과 네팔 수교 50주년을 맞아 양국 간 특별한 이정표를 남겼다.
원정대는 지난 27일 한 차례 정상 등정에 나섰다가 정상을 불과 200여m 남긴 채 초강력 눈폭풍을 만나 정상 문턱에서 중단해야 했다. 엄홍길 대장은 “좌절하지 않고 반드시 다시 등정에 나서 성공하겠다”며 대원들을 격려했다. 그리고 정상 등정 실패 6일 만에 끝내 정상에 섰다.
엄 대장은 “이번 원정은 하루하루 날씨와의 전쟁이었다”며 “봄인데도 동계 등반으로 착각할 정도로 추위와 매서운 눈폭풍이 매일 몰아 닥쳤다”며 “’한국-네팔 우정 원정대 2024’는 양국 관계에도 시련은 있을지언정 극복하면 결국 행복한 결과를 준다는 것을 보여준 듯하다”고 했다. 그는 “쥬갈 히말라야 등정 성공은 한국과 네팔 수교 50주년을 맞아 히말라야 신이 양국에 주신 큰 선물”이라며 “신께서 다시 한번 등정을 허락한 것은 양국 외교가 앞으로 50년 아니 100년 더 관계 발전을 이루라는 특별한 메시지를 준 것”이라고 했다.
원정대는 4월 5일 서울을 떠나 카트만두에 도착했으며, 13일 쥬갈 히말라야 4700m 고지에 베이스캠프를 차렸다. 베이스캠프에서 정상 공격을 위한 준비를 마친 뒤 15일 베이스 캠프에서 500m 위에 전진기지 격인 하이캠프를 구축, 정상 도전을 위한 루트설정 작업을 해왔다. 하지만 아무도 오르지 않은 미답봉인데다 애초 구상했던 등정로 작업이 예상과 달리 정상과의 길이 단절되는 바람에 시작부터 험난한 과정을 거쳐야 했다.
엄 대장을 비롯한 대원들은 19일부터 하이캠프를 제2의 베이스캠프 삼아 정상으로 향하는 루트 개척에 나섰다. 하지만 매일 눈폭풍이 몰아쳐 허리까지 차오르는 눈밭을 헤치며 길을 만드는 작업(러셀)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하루 고생해 길을 만들어놓으면 다음날 눈이 내려 흔적도 없이 만들어 낭패를 보기 일쑤였다.
며칠 고생 끝에 5800m 고지에 캠프 1을 차리려 했지만, 텐트 1개동을 칠 공간조차 확보할 수 없는 험준한 지형이라 이마저도 여의치 않았다. 지난달 27일 악천후를 피해 음력 보름 며칠 지난 야간 시계를 이용한 등정에 나섰다가 정상 목전에서 눈보라를 만난 것은 큰 아픔이었다. 베이스캠프로 철수한 엄 대장과 대원들은 ‘두 번 실패하지 말자’고 다짐했다.
다행히 5월 3일 날이 맑아 하늘이 준 기회로 삼았다. 새벽 1시 정상 공격에 나선 엄 대장과 락파 셰르파 등 3명은 거침없이 정상을 향해 나갔다. 험준한 지형을 관찰하며 결국 한 발씩 내디뎌 마침내 정상 등정에 성공했다.
엄 대장은 2007년 로체(8400m) 등정을 계기로 고산(6000m 이상) 등정을 중단했지만, 올해 한국과 네팔 수교 50주년을 맞아 17년 만에 등정에 나섰다. 이번 등정지는 네팔 수도 카트만두에서 북동쪽으로 145km 떨어진 쥬갈 히말라야의 험준한 산군(山群)에 둘러싸인 봉우리로 네팔 정부가 60여년 만에 처음 공개한 등정지다. 이에 루트를 새로 만들어 가야 하는 등 고난의 연속이었다.
원정대는 기상 이변과 눈폭풍이 몰아닥치는 악천후를 극복하고 등정에 성공해 한국과 네팔 수교 50주년을 맞아 양국 간 특별한 이정표를 남겼다. 엄 대장은 “쥬갈 히말라야 1봉은 6500m급이지만 거의 8000m급과 비교되는 험준한 지형으로 구성된데다 이번 원정기간 계속된 기상이변으로 엄청난 시련을 겪었다”며 “대원들의 열정에도 히말라야의 변화무쌍한 기상 여건 등을 감안하면 정말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만든 특별한 결과”라고 했다.
그는 “사실 베이스캠프로 이동하는 첫날부터 눈이 내리지 않은 날이 없었다”며 “특히 지난달 17일 베이스캠프와 하이캠프에 텐트가 통째로 날아갈 정도의 강력한 눈폭풍이 불어닥쳐 극도의 공포감을 줄 정도였다”며 “그날 고통의 시간을 견딘 것이 좋은 결과로 이어졌다”고 했다.
엄 대장은 또 “17일 하이캠프에서 캠프 1 구축을 위해 나섰던 변준기 대원이 루트 개척 작업 중 추락하며 손목이 뒤틀리는 사고가 발생했고, 21일 캠프 1 구축에 나섰던 네팔 대원 다메 셰르파가 눈사태로 600m 추락하는 사고가 발생하면서 대원들이 충격을 받았지만, 다행히 두 대원 모두 무사히 구조되면서 오히려 등정 성공을 위해 결속을 다지는 계기가 됐다”고 했다.
엄 대장은 “두 사건 모두 자칫 큰 사고로 이어질 뻔했지만 히말라야 신께서도 이번 등정의 의미를 보살핀 것 같다”며 “히말라야 등정은 히말라야 신의 배려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다시 한번 뼈저리게 느꼈다”고 했다.
엄 대장은 지난 2007년 로체 등정을 마지막으로 8000m급 16좌(봉) 완등에 성공하면서 고산 등정을 중단했다. 어찌 보면 산악인의 현역 은퇴와 다름없다. 하지만 한국과 네팔의 수교 50주년을 맞은 올해 본인이 직접 자금을 마련해 원정대를 구성한데다 원정에 성공하면서 세계적인 산악인에서 나아가 진정한 민간 외교관의 진면목을 보였다는 평가를 받는다.
아시아기자협회 홍보대사를 맡고 있는 엄홍길 대장은 2009년 여성 산악인 오은선씨와 함께 ‘엄홍길-오은선의 치어 챌린지’ 프로그램에 나와 자신의 산악인생을 소개한 바 있다.
이번 원정에 나선 대원들은 엄 대장보다 10년 이상 젊은 대원들로 나이를 초월한 선후배 간 산악인의 단결력을 보여줬다. 김동진 대원은 “하이캠프 구축하기 위해 나선 첫날 허리까지 눈이 빠지는 열악한 상황에서 엄 대장이 직접 눈을 헤치며 길을 내는 러셀작업을 하는 것을 보고 놀랐다”며 “60대 중반의 선배라기보다는 이제 한창 힘을 쓰는 우리보다 더 체력이 대단하다는 것을 느꼈다. 역시 소문으로 듣던 엄 대장은 엄 대장이었다”고 했다.
이번 원정대는 엄홍길휴먼재단, 대한산악구조협회, 네팔등산협회의 합동 등반으로 의미를 더했다. 엄홍길 대장이 양국 합동 등반대장으로, 한국 측 대장엔 구은수(54) KARA 부회장을 비롯한 정재균(전북구조대·52), 백종민(강원구조대·51), 김동진(제주구조대·51), 엄태철(대구구조대·48), 변준기(대전구조대·46) 등 7명이 나섰다. 네팔에서는 최연소 K2(8611m) 등정자이자 네팔 여성 최초 안나푸르나 1봉(8091m) 무산소 등정자인 다와 양줌(34·네팔등산협회 부회장·베이스캠프 동행), 히말라야 9좌 최단 등정 기네스 세계기록 보유자이자 14차례 에베레스트(8848m) 등정자인 락파 덴디(36), 람바 바부(35), 다메 셰르파(30) 등 양국의 베테랑 산악인들로 합동 등반팀을 구성했다.
푸쉬파 카말 다할 네팔 총리는 한국과 네팔의 산악 전문가들로 구성된 이번 원정대가 무사히 등정한 것을 축하했다. 그는 “이번 원정 성공은 한국과 네팔의 영원한 우정을 담는 기념비적인 이정표를 남겼다”며 “한국과 네팔이 수교 50주년을 맞아 산악인뿐만 아니고 정부와 민간차원 등 다양한 방면에서 밀접한 관계를 유지해 나갔으면 한다”고 말했다.
푸쉬파 카말 다할 네팔 총리는 “엄 대장이 NG0(비정부기구)인 엄홍길휴먼재단 대표로서 양국 친선을 위해 단기간 대원을 구성해 등정한 것을 치하한다”며 “이번 원정 성공은 한국과 네팔의 영원한 우정을 담는 기념비적인 이정표를 남겼다”고 했다.
다할 총리는 “한국과 네팔이 수교 50주년을 맞아 산악인뿐만 아니고 정부와 민간차원 등 다양한 방면에서 밀접한 관계를 유지해 나갔으면 한다”고 말했다. 그는 “한국과 네팔 수교 50주년 해인 올해 한국을 꼭 방문하고 싶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