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슬링 영웅’ 김원기 떠나보내는 엄홍길 대장의 편지 “히말라야 함께 가자던 그 약속···”
[아시아엔 편집국] 1984년 LA올림픽 레슬링 금메달리스트로 유명한 ‘레슬링 영웅’ 김원기씨가 27일 오후 강원도 원주 치악산을 부인과 함께 등반하던 중 갑작스런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슬하에 자식은 없지만 어려운 환경에 처해있는 아이들의 부모를 자처하며 선행을 베풀어온 그였기에 더욱 안타까운 이별입니다. 특히 15년이 넘는 세월 동안 김원기 씨와 인연을 맺어온 엄홍길휴먼재단의 엄홍길 상임이사는 수화기 너머로 그의 부고를 전해들으며 그 누구보다 슬퍼하고 안타까워 했습니다. <아시아엔>은 엄홍길 대장과 이상기 <아시아엔> 발행인의 통화를 정리해 엄홍길 대장이 김원기씨에게 전하는 편지를 게재합니다. -편집자
어제 저녁 6시경 전화가 울리더라. 개인적으로 중요한 용무를 보고 있어서 바로 못 받았는데 세 번이나 오더라고. 급한 일 같아서 받았더니 수화기 너머로 네 소식이 들려오더라. 내년에 나랑 같이 히말라야 오르기로 했던 네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
전후 사정 들어보니 제수씨와 강원도 치악산 비로봉 오르던 길에 안 좋은 일이 벌어졌다고 하더구나. 산 타다 정상 밑에서 잠깐 쉬었는데 못 일어서고 심근경색으로 갑자기 쓰러졌다고···. 대처라도 빨랐어야 하는데 강원도에 헬기가 없어서 서울에서부터 헬기를 기다리느라 시간도 많이 지연됐다고 들었다. 불과 며칠 사이 일어난 많은 일들이 원망스럽고 한스럽구나.
바로 지난주 목요일만해도 철원의 군 부대에 강연하러 갔다가 만나서 저녁 함께하며 즐거운 시간 보냈었지. 그날 저녁, 내가 대접한다는 거 왜 먼저 계산하고 그 뒷모습만 남긴 채 떠나갔니···. 그게 네 마지막 모습이 될 거라고는 꿈에도 몰랐다. 맛난 밥 한 끼 챙겨주지 못하고 너를 떠나보낸 게 허무하고 슬프구나.
우리가 처음 만난 건 2001년이었지. 지인소개로 알게 됐는데, 그 이후 15년이 넘는 세월 동안 서로 마음을 터놓고 지내며 서로를 아껴왔지. 2008년 엄홍길 휴먼재단 설립 당시, 초창기부터 이사로 참여하며 늘 곁에서 큰 힘 보태준 것 참으로 고마웠다. 강한 책임감을 갖고 매사 모든 일에 열정을 다하던 네 모습이 지금도 선하구나.
1984년 올림픽에서 금메달까지 딸 정도로 대단한 선수였지, 원기는. 은퇴 이후에는 개인사업을 하면서 운동선수 특유의 승부근성으로 온 힘을 다해 열정적으로 도전하는 모습에 나도 좋은 기 많이 받았단다. 슬하에 자식은 없었지만 열 명이 넘는 아이들을 양자로 삼아 매달 장학금 주고, 레슬링하는 후배들과 가정형편 어려운 아이들도 자기 자식처럼 대하면서 장학금에 용돈도 챙겨주던 원기. 내 동생이지만 세상 누구보다 존경스럽고 멋져보였다.
물론 일로 치이며 힘들어하는 네 모습, 형도 지켜보기에 가슴 아플 때 많았다. 지자체의 하수처리장 만드는데 필요한 자동모터를 생산하고 판매하면서, 공무원들 만나서 미팅도 하고 입찰도 신경 써야 하고. 운동할 때와는 또다른 느낌의 치열함이었겠지. 경쟁이 치열한 그 곳에서 스트레스도 많이 받았었고. 사업이 잘 풀려서 너도 재단을 설립해 좋은 뜻 펼치며 세상 아름답게 만들어 갔으면 좋으련만 세상일이 녹록치만은 않구나.
원기야, 우리 함께 히말라야 등반했던 시절 기억나니? 2010년 즈음, 엄홍길휴먼재단 설립하고 우리가 네팔 팡보채(4,060m)에 첫 번째 학교 지으러 갈 때였지. “형님이랑 산도 타고 학교 짓는 것도 보고 싶다”해서 같이 갔지. 산 타는 거 좋아하던 제수씨도 함께 말이야. 오늘따라 그 날이 사무치게 그립구나. 불과 얼마 전만해도 “히말라야 가본지 오래 됐는데, 형님 내년에 갈 때 꼭 좀 데려가 달라”고 했던 내 동생 원기인데. 내년 초 히말라야 함께 오르며 좋은 기운 받기로 했던 그 약속, 이제는 지킬 수 없다는 사실이 너무나 슬프구나.
비록 우리 한동안 떨어져 있을 수밖에 없겠지. 하지만 언제 어디선가 다시 만나 못다 한 소주 한잔에 회포도 풀고, 히말라야 함께 올라 못다한 약속 지킬 수 있는 날이 오길 기다리마.
사랑하는 동생 원기를 떠나보내는 홍길로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