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신이 발자취] 부산민주화운동 ‘거목’ 배다지 ‘민족광장’ 상임의장

“처음 민족회의에서 사회운동을 시작할 때 늘 따뜻하게 격려해주셨던 모습과 어려운 일마다 원칙을 짚으며 앞에서 이끌어 주셨던 의장님이셨다. 병환 전에는 일년에 한두번 꼭 전화를 하셨는데 그건 부산에 사는 김재규 선생님을 찾으시는 전화였다. ‘김재규 동지’ 하셨다. 그럼 내가 ‘의장님 전화 잘못하셨어요’ 하면 ‘아 서울에 재규가?’ 하시고 ‘잘 지내지’ 하고 머쓱하여 끊으셨다. 그 전화가 그리도 반가웠는데 작년부터인가 전화가 없으셨다. 먹먹하다 의장님 평생 고마움을 간직하며 살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민화협)에서 젊음을 바치고 15년 전부터 경기도도시농업시민협의회에서 일하는 김재규씨가 13일 90세를 일기로 별세한 부산민주화운동 원로 배다지 민족광장 상임의장 소식을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린 글이다.

배다지 의장은 동래중학교에 입학한 1948년 남한 단독정부 설립을 반대하는 동맹휴학 투쟁에 나선 데 이어 1949년 남한 단독정부 설립을 반대하는 유인물을 뿌리려고 준비하다 경찰에 붙잡혀 고초를 치렀다. 배 의장은 언론 인터뷰에서 “당시 인생의 큰 시련이었지만 아무도 밀고하지 않고 스스로 이겨냈다. 정말 잘한 일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는 부산대에 진학한 뒤 1955년 민족문화협회에 참가했고, 1958년 <국제신문>에 기자로 일했다.

배 의장은 1960년 민주민족청년동맹 경남도맹 간사장을 맡았고, 1961년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 결성에 참여했으며 2·8한미경제협정반대 경남공동투쟁위와 민족자주통일경남협의회 결성에도 힘을 보탰다. 1961년 5·16으로 민주민족청년동맹과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가 강제해산된 뒤에는 1년 남짓 도피생활을 했다. 이후 1964년 옛 <마산일보>에서 기자 생활을 다시 시작했다.

그는 통일혁명당(통혁당) 사건에 연루됐다. 1968년 <경남매일신문> 기자로 일할 때 통혁당 핵심인물이자 회사 간부였던 인사와 회합·통신을 했다는 이유로 징역 3년형을 선고받아 옥살이했다. 이와 관련 배 의장은 2022년 11월 “통혁당 사건과 관련이 없는데 불법연행돼 진술 강요로 실형을 받았다”며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에 진실규명 신청을 했다.

배 의장은 1987년 자주평화통일부산회의 창립에 참여해 의장대행을 맡았다.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 부산연합 상임의장이던 1989년에는 국가보안법 등 위반혐의로 6개월 동안 복역했다. 1995년에는 ‘부산땅 하야리아 되찾기 시민대책위’ 상임대표를 맡아 부산 도심인 부산진구에 자리한 미군기지(캠프 하야리아) 반환운동에 앞장섰다. 1997년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 상임의장, 2000년 민주개혁국민연합 공동대표 겸 부산대표 등을 역임했다. 2010년 ‘민족광장’을 설립해 상임의장에 취임했고, 같은 해부터 작년까지 김대중 부산기념사업회 이사장을 맡았다.(이상 <한겨레신문>(김영동 기자) 기사 참조)

다음은 부산김대중기념사업회 이사장을 맡고 있던 2015년 9월 2일자 한겨레신문에 쓴 기고문이다. 제목은 ‘전경련 남북사무소 적극 추진을’.

남과 북이 지난 8월25일 남북관계를 개선하기 위한 의미있는 합의를 했다. 모처럼의 합의가 결실을 맺도록 남과 북 모두가 적극적으로 노력해야 한다. 나는 각 분야 교류협력을 활성화하는 차원에서 서울과 평양에 남북 경제단체 연락사무소를 설치하자는 전경련의 제안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자고 주장한다. 전경련의 지난 7월 제안은 민족경제 건설과 그에 따른 민족통일을 촉구하는 경제인들의 통일 촉구 선언이나 다름없다. 간접적으로 하루속히 5·24 조치를 해제할 것을 주문한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박정희 대통령이 무덤에서 일어나 7·4 공동성명을 실행하지 않고 무엇하는가, 하고 그 따님 박근혜 대통령에게 호통치는 소리이며, 김대중 대통령이 부활하셔서 하루속히 6·15 남북공동선언을 힘차게 실행할 것을 촉구하는 말씀과 진배없다.

전경련이 어떤 단체인가? 반공을 국시로 하는 대한민국의 가장 강력한 경제적 토대가 아닌가. 이 전경련이 정부 차원의 남북 협의기구도 아직 없는 터에, 그리고 5·24 조치가 시퍼렇게 날을 세우고 있는 사실을 뻔히 알면서, 남북 경제단체 연락사무소를 제안했다는 것은 그만큼 시급하고 절실하다는 뜻이다. 우리 경제가 이렇게 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 절박한 호소와 같은 것이다. 다른 말로 한다면 반공체제에 힘입어 성장 발전해온 우리 경제가 이 체제 가지고는 더 살찌울 수 없다는 진단이다. 이제 이 반공체제가 오히려 경제 생산력을 저해하는 거추장스러운 걸림돌이 되었다는 뜻이다.

정치권력 앞에는 한없이 약한 게 경제인이요 그 경제단체인데, 얼마나 애가 타고 절박했으면 사정(국가보안법, 5·24 조치 등)에 의해서 금지된 경기장에 뛰어들었을까. 하기야 자본이란 더 많은 이익을 챙기기 위해서는 법망도 뚫고 들어가는 것이 생리이고 보면 고도성장으로 승승장구했던 우리 경제가 중국 쇼크 등으로 새로운 출구를 넘보는 것은 극히 필연적인 역사의 흐름이다. 돌아가신 정주영 회장이 소 떼를 몰고 고향을 찾은 일이 새삼 즐겁게 떠오른다.

연락사무소 개설에 따른 구체적인 사업 내용을 살펴보자.(<한겨레> 7월16일치 2면)
1. 전경련은 평양, 북쪽 조선경제개발협회는 서울에 각각 연락사무소 설치 2. 한반도 서부축 경제협력 루트 확보 3. 남북 접경지역 경제협력사업 재개 및 확장 4. 남북 경제협력 신규 산업단지 개발 5. 북한 기업 살리기 프로젝트 등 6. 북한 산업기술인력 양성 7. 동북아 다자 경제협력사업 등.

참으로 눈이 번쩍 뜨이는 제안이다. 짙은 구름 사이를 뚫고 내비치는 한줄기 섬광처럼 빛나는 제안이다. 전경련은 우리 경제의 절실한 필요, 즉 새로운 성장 모멘텀을 찾기 위함이라고 했다. 북측도 시장화와 개혁 확대를 꾀하고 있는 만큼 이해관계가 일치한다. 남남북녀란 말대로 사람에 빗댄다면 찰떡궁합 아닌가. 상품이 들어서 전근대적 봉건적 장벽을 뚫어냈듯이 전경련의 제안이야말로 남북 분단의 장벽을 허무는 계기가 될 것은 물론이요, 우리 민족의 번영을 도모할 토대가 될 것이다. 남쪽도 북쪽도 기존 체제로는 더 발전할 수 없는 한계에 임했다고 볼 때 이 제안이야말로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란 여유 있는 제안이 아니다. 안 하면 죽는다는 백척간두에 선 배수진에서의 외침 같은 것이다.

전경련이 현실의 법률적 장애를 초월하고 나섰다는 것은 경천동지할 사변이나 다름없다. 이 땅의 모든 지도자는 전경련의 제안을 역사의 흐름을 바로 이해하는 계기로 삼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 제안을 선점하는 정치세력이 다음 정권의 담당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한편 배다지 의장은 앞서 2002년 9월 12일(1차), 13일(2차), 15일(3차) 530분에 걸쳐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인터뷰(김선미 진행)를 통해 인생 역정을 토로한 바 있다. 이 사료는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사료관 오픈아카이브에 보존돼 있다.

아래는 구술내용 요약과 관련 링크다.

출생 및 유년 시절, 동래중학 및 임시수도 시절, 이종률 선생과의 조우와 일화, 부산대 정치학과 분위기, 국제신보사 입사 관련 일화, 1980년대 민민운동, 민족문화협회 활동, 민주민족청년동맹의 결성 계기, 민민청 조직 기구와 주요활동, 2대악법반대투쟁, 교원노조합법화투쟁 지지활동, 경남민민청사건과 부산민민청사건, 7.29총선 당시 활동과 평가, 경남노인회 결성과 지원, 인혁당사건과 통혁당 사건, 자주평화통일민족회의 활동, 98년 대선 시 민중후보론에 대한 입장, 국내정치와 통일문제, 통일에 대한 전망

https://archives.kdemo.or.kr/oral-archives/view/3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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