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전도사 강민구⑤] “공짜 없는 세상, 남 먼저 돕는 게 최고 기쁨”
서울고등법원 강민구 부장판사의 꿈이 몇개 있다. 대한민국 사람 누구나 디지털 문맹에서 벗어나 스마트폰과 함께 노후를 자신감 넘치게 보내는 것, 그리고 정부, 국회, 언론 등 여론주도층 인사들이 제발 자신의 목소리에 적극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그는 1985년 스스로 육사교수 시절부터 코딩 언어를 학습해, 훗날 1998년 대법원 종합법률정보 시스템 구축에 크게 기여했다. 2000년 미국 연수시절, 당시로서는 세계 첨단이던 미국의 21세기 전자법정 사법시스템을 체험·학습한 후 낸 <함께하는 법정>(박영사, 750쪽)은 한국 전자법정과 전자소송의 주춧돌이 됐다.
2016년 부산법원장 시절 서울을 오가면서, 대법원 사법정보화 발전위원회, 2017년 사법정보화 전략위원회 각 위원장으로 차세대 사법정보시스템의 핵심 얼개 구축활동도 했다. 최근엔 블로그와 유튜브 채널을 통해 첨단기술의 효용과 디지털 혁신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한편, 전경련 등 공공기관에서 관련 특강에 나서고 있다. 그는 ‘QR 코드 활용비법’, ‘구글 어시스턴트 활용법’, ‘구글 알리미 활용법’, ‘에버노트 왕초보 탈출법’, ‘구글렌즈 활용법’, ‘클로바노트 활용법’ 등을 최신 스마트폰 사용법을 전파하는 디지털 전도사로 활동 중이다.
디지털 음영지대를 시급하게 해소하자는 내용의 ‘혁신의 길목에 선 우리의 자세’란 강연 콘텐트는 유튜브에서 135만 조회를 기록했다. 관련 짧은 영상들을 포함하면 210만 조회를 넘고 있다. <매거진N>은 강민구 판사를 5월 4일 오후 2시반 서초동 그의 사무실에서 만났다. 애초 인터뷰를 의도하지 않았지만, 얘기를 나누면서 ‘이 분의 생각과 실행을 독자들께 전하지 않는다면 직무유기’란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기자가 인터뷰로 정리하겠다며 승낙을 구하고 스마트폰으로 녹음을 시도하자, 그는 “이 방 나가기전 텍스트로 받을 수 있겠다”며 자신의 스마트폰으로 녹음을 시작했다. 2시간 가까이 이어진 대화는 그의 방을 나올 때 텍스트 형태로 기자 핸드폰에 옮겨 있었다. 분량은 200자 원고지로 180장이 넘었다. 강 판사 얘기를 아이템별로 정리했다. 5월 4일 대면 및 이후 온라인 인터뷰 등을 바탕으로 강민구 판사의 삶과 철학 그리고 꿈을 <아시아엔> 독자들에게 전한다. <편집자>
‘적선지가 필유여경’···37년 전 육사근무 인연 소중히 간직
1985년부터 88년까지 나는 육사에서 생도들을 가르쳤다. 내가 컴퓨터를 잘하는 이유가 육사 근무의 경험이 필수적이다. 그때 최승우 장군(육사 21기)이 생도대장으로 있을 땐데, 지금도 인간관계가 둘도 없는 사이다. 그는 대한민국 판사는 강민구밖에 없는 줄 아는 분이다. 그때부터 인연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나는 육사에서 일반 군형법 등을 1주일에 12시간씩 1500시간 강의했다. 구술강연의 힘이 형성되어 훗날 법정에서의 재판 진행, 모든 글을 자판이 아닌 구술입력으로 처리하는 능력, 기관 운영 리더십 등 육사에서 오늘의 인생이 그렇게 형성된 거다.
PC가 없었을 때였는데, 전산장교한테 밥 사고 술 사면서 모르면 물어가며 컴퓨터에 책 갖다 놓고 파스칼·포트란 같은 언어를 그때 육사에서 배웠다. 1988년 전역했는데 몇 달 지나고 나서 만년필로 서너 달 판결문을 쓰다가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어 용산에서 조립 컴퓨터를 샀다. 중고차 한 대 값이었다. 그때 286이 처음 한국에 나왔을 때다.
국가에서 판사한테 컴퓨터 준 거는 1992년이니, 4년 먼저 초임지 의정부지원에서 활용했다. 당시 군인이 교통사고로 사망하면 정년까지 호봉승급을 호프만식으로 복잡하게 계산하는데, 수작업으로 계산기 두드리면서 하면 별지 표가 맞아 최종 확인될 때까지 일주일 걸렸다. 그런데 컴퓨터의 ‘쿼트로프로’ 프로그램의 함수 기능으로 작성하니, 단 15분 만에 판결문 계산표가 완성된다. 당시 19명의 판사들이 놀라, 그들도 한 달 안에 컴퓨터를 다 샀다. 그때 샀던 사람이 민사단독·형사단독 판사로 와있던 이진성 전 헌법재판소장, 박시환 전 대법관 등이다. 나는 그 일로 컴퓨터 언어를 아는 판사라고 소문이 났다.
MS-DOS를 독학하고 컴퓨터 잡지를 정기구독하면서 커터 칼로 오려 모으면서 목차를 매기고 제본해 6개월 치를 500쪽 짜리로 만들어 공부했다. 15년 이상 그 방식을 사용했다.
학원에 갈 시간이 없어서 모르는 건 전문가한테 묻고 고시공부하듯 했다. 법원 내 컴퓨터 최고수라는 그 이름 때문에 1997~98년 법원도서관 조사심의관으로 가서 지금도 쓰고 있는 ‘종합법률정보’라는 대한민국 최고의 법률 DB를 만들었다. 당시 내가 지휘봉을 잡고 PM으로서 오픈베이스팀을 이끌었다. 벤처기업이던 그 회사는 현재 상장 중견 IT기업으로 성장해 있다.
김용담 대법관 “강 판사가 우리 재판연구관들 목숨 연장해줘”
1998년 9월 1일 자로 대한민국 판사들한테 판례·법령·논문을 가위질해서 쓸 수 있는 걸 건국 이래 최초로 만들었다. 김용담 대법관님이 당시 수석재판연구관인데, “강 판사가 우리 재판연구관들 목숨을 연장해줬다”고 하고, 송영길 의원의 형 송영천 재판연구관(현 변호사), 이광범 재판연구관(현 LKB 파트너스 로펌 대표) 이런 이들이 나한테 술도 사고 밥도 샀다. 전에는 판례를 보고 타자를 쳐야했는데, 이젠 마우스로 갖다 붙이면 10배, 100배의 효율이 나는 거였다. 그 일로 당시 재판연구관실의 영웅이 됐다.
그리고 나서 미국 버지니아주의 윌리엄스버그의 NCSC(미국 주법원행정처)로 연수를 갔다. 한국에선 꿈도 못 꾸던 전자법정과 전자소송 특별프로그램으로 하루 8시간씩 캠코더를 설치해 녹화하고, 집에 가서는 헤드폰 끼고 밤 새워 노트 정리하는 일을 했다. 3개월간 그렇게 했다. 그후 이런저런 논문을 30여종 썼는데, 당시 연수 결과보고서가 ‘21세기 사법 정보화의 방향과 과제’였다. 250쪽 분량이다. 한국의 전자소송·전자법정 설계도가 된 거다. 내가 21세기 디지털 문익점이 되어 미국에서 모든 데이터를 별첨 CD에 담아 그 보고서를 완성했다. 그후 2003년 자료를 추가해서 <함께하는 법정>(박영사) 단행본 750쪽을 만들었다. 후배들이 이걸 보고 ‘돌격 앞으로’ 해서 전자소송·전자법정·화상재판 등이 대한민국에서 뿌리를 내린 거다.
인생의 좌표: 적선지가 필유여경
내가 가슴에 담고 있는 말이 ‘적선지가 필여유경’이다. 1978년 서울대 위탁교육 온 육사생도들에게 노트 빌려준 게 이렇게 열매를 맺은 것이다. 육사로 가서 전산을 배우고 전역해서 PC를 남들보다 4년 먼저 샀고, 혼자서 뼈 빠지게 또 독학하고, 조사심의관 하면서 틀을 짜고 미국 가서 확실하게 배우고···. 그러니까 이제 운명이 법대 다닐 때 정해진 거다. 지금도 계속 그분들 하고 교유관계가 있다. 1978년도에 어떤 정의감 내지는 유신시대 육사출신이라고 비난 받던 저 형들은 ‘죄가 없다. 공부하겠다는데 도와줘야지’ 하는 생각이 여기까지 나를 이끈 거다. 하지만 당시 그게 정말 쉽지 않은 일이었다. 또 다른 일도 있었다. 내가 과목별로 30개씩 예상문제를 대학노트에 뽑아가지고 240문제를 정리했다. 그런데 24회 사법시험에 열여덟 문제가 그 노트에서 나왔다. 그게 족보가 된 거다. 서울대 후배들, 동기들이 복사해서 도움받았다. 육사 교수 하면서 일주일에 세 문항씩 2차 모의고사를 1년 52주, 3년간 한 주도 안 빠지고 모의고사 예상문제를 뽑아 후배와 동기 중 대표한테 등기로 보내면 그걸 토요일 법대 강의실에서 앉아 밀봉돼 있는 거 뜯어 두 시간 동안 모의고사를 보고 자기들끼리 돌려서 채점하고 그랬다. 그거 바보 아니면 못 하는 거다. ‘적선지가 필유여경’ 맞지 않나? (이때 기자가 윤석열 당선자한테는 안 주었냐고 묻자, ‘윤석열은 스타디 멤버는 아니었다. 윤 당선인이 그 스타디 그룹에 들어왔으면 대통령 못 했을 거’라고 했다)
‘컨트리 보이’의 경험이 보약이 되고
경상북도 선산중학교 2학년 때 낫질을 하다 왼손가락을 베어 뼈가 허옇게 보일 정도였다. 당시 시골에 병원이 있나, 약국이 있나, 된장 바르고 나은 적이 있다. 이 이야기를 왜 하냐 하면, 2000년 초임 부장으로 대구지방법원에 근무할 때다. 대구라고 해도 농촌 출신이나 서민들 사건이 많았다. 돈 있는 사람들은 재판 오기 전에 ‘쇼당’으로 다 합의하고 그러지만 없는 사람들이 주로 재판에 온다. 그 사람들 내 방에 불러서 차 한잔 따라주고 낫에 벤 손가락 보여주면 첫마디가 ‘판사님도 꼴 베었습니까?’ 내가 ‘맞습니다’ 답하면 내 손가락 만지며 피고 원고 모두 나를 믿고 소장 답변서에 숨겼던 이야기를 다 털어놓는다. 그러면 그 자리에서 합의가 되곤 했다. 한달에 15건씩 합의조정했는데 이 손가락 때문에 합의한 게 2년간 50건이 넘더라. 재판할 때 원고와 피고를 내 방으로 모시고 와서 대리인 하고 차를 한 잔 하고 나면 마음이 열린다.
이런 적도 있었다. 일본 회사가 특허를 갖고 있는 제초제를 한국 대기업에서 유사품을 만들어 한일간의 ‘국제 제초제 특허분쟁’이 있었다. 한국 회사에 대해 일본 회사가 손해배상을 청구한 사건이다. 중절모를 쓴 일본 신사들이 재판정에 항상 입회를 하는데, 뒤에서 자기 변호사가 똑바로 하는지 감독하는 거였다. 어느 날 그들을 방으로 불렀다. 그리곤 차에 대해서 30분 정도 ‘강의’를 했다. 임진왜란 이후 일본에서 차가 들어온 역사를 듣더니 일본 회사 중역이 ‘차를 아시는 재판장이라 국수주의적으로 재판하실 것 같지 않다’며 ‘조정안이 있느냐’고 묻더라. 바로 내가 기다리던 바였다. 나는 이미 4장으로 출력해놓은 걸 보여주자 읽어보더니 ‘오케이’ 하더라. 한국의 대기업측도 물론이고. 그런데 일본 회사 중역이 회장한테 가서 결재를 맡아 다시 오겠다고 하기에 내 폰을 주면서 ‘비행기 값도 아끼고, 복도에 가서 전화로 지금 보고해라’ 했다. 15분쯤 후 돌아오더니 ‘회장님도 승낙했다’고 하더라. 애초 쉽지 않았던 수백억 규모의 국제 특허 손해배상 재판이 하동에서 주문해서 마시는 차 한잔으로 해결된 것이었다. 재판에 임하면서 나는 가용한 모든 수단과 도구를 사용하는 셈이다. 낫에 벤 손가락도 쓰고, 마시는 차도 쓰고···. 말 그대로 올라운드 플레이를 하는 거다. 판결보다 중요한 거는 합의로 해결하면 윈윈이기 때문이다.
에필로그
원고지 180장 분량의 강민구 판사 인터뷰를 60매로 요약·정리하는 것은 지난한 작업이었다. 지난 4월 28일 첫 통화 이후 5월 4일 대면, 그리고 윗 글이 정리되기까지 강 판사는 카톡과 전화를 통해 용어와 고유명사 등 틀리기 쉬운 대목을 수시로 수정해주었다. 그의 육사 교수시절 인연을 맺은 최승우 장군은 기자에게 “강민구는 내가 아는 한 도전적 용기가 가장 뛰어난 판사”라고 했다. 강 판사는 6월 10일 서울대법대동창회 선정 ‘제2회 창의적인 서울법대인’ 상을 받았다. 그는 “맨날 컴퓨터·스마트폰 잡고 있다며 볼멘소리 하던 아내가 상 받는 걸 알고선 내 일을 인정해주기 시작했다”고 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