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승우 칼럼] 군의 정치 중립과 1987년 대선의 추억

“대통령선거는 군의 통수권자를 결정하는 중요한 행사인데 우리는 진정 고민해서 선택해야만 한다. 나는 육군 준장의 계급과 생도대장이라는 직책을 걸고 어느 누구도 여러분의 기본권을 침해하는 간섭을 절대로 허용하지 않을 것이다.”(본문 가운데)  사진은 1987년 대선에 나선 1노 3김 4명의 후보들. 왼쪽부터 김대중 노태우 김영삼 김종필 후보

필자가 1986년 1월 1일부로 영예의 장군 진급 후 첫 보직은 7사단 부사단장이었다. 당시 군 사령관은 군사령부 전입신고 시에 나의 다음 보직을 군 인사처장으로 미리 내정했음을 분명히 밝혔다. 그래서 나는 부임과 동시에 차기 보직에 대해서는 생각 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부사단장 근무 6개월 후 뜻밖에도 육사 생도대장으로 명을 받았다. 내게는 영광스런 자리였지만 한 가지 고민이 생겼다. 군사령부 전출신고가 있기 전에 “군사령관이 무슨 얘기를 할 것인가”, “혹시 오해가 없겠는지…” 등등 평소 나답지 않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최 장군! 나와 함께 근무하는 것이 싫어서 떠나는가?”하는 농담조의 얘기라도 내게는 듣기 거북한 부담이었다. 1986년 6월 군사령부에서 전출 신고가 있었으며 신고 후 커피를 마시면서 대담하는 가운데 군사령관은 미안하다는 얘기를 했다. 나는 도무지 무슨 뜻인지 몰라 조용히 듣고만 있었다.

군사령관은 “최 장군, 미안하다. 내가 약속대로 같이 근무하려고 했는데 참 아쉽게 되었네. 특히 참모총장께서 육사 생도대장으로 최 장군을 결정했으니 내가 기꺼이 양보할 수밖에 없었지. 특히 현재 생도대장은 당신보다 4년 선배인 17기인데 18기 19기 20기 3개 기수를 뛰어넘어 21기로 결정된 것도 대단히 영광스런 일이니 그리 알고 가서 멋있게 잘해 보도록. 최 장군은 참 잘 할 거야”라는 덕담을 해 주었다.

이렇게 되어 나는 1986년 6월 육사 생도대장으로 부임하게 되었다.육사 생도대장은 학과 과목을 가르치는 교수부의 교육활동과 학과 성적관리 등을 제외한 생도들 일상생활과 훈육 전반에 걸친 모든 활동에 직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며 육사 교육목표인 “사관생도로 하여금 장차 육군의 정예장교로서의 임무수행과 지속적 발전에 요구되는 지적 능력, 고결한 품성, 강인한 정신력, 자유민주주의 정신에 기초한 확고한 국가관 함양”에 대한 막중한 책임을 지닌 직책이다. 학교장을 제외한 육사 최고의 지휘관인 셈이다.

이런 환경 속에서 생도들은, ‘확고한 국가관과 협동, 봉사, 희생정신 등을 함양하고 합리적 사고와 자기통제 능력을 키우게 되며 우수한 훈육요원과 훌륭한 교수들의 지도하에 일반학과 및 군사학을 연구하고 지휘 통솔력 배양을 위한 자치지휘근무 실습을 실시하며, 고매한 품격 형성을 위한 명예제도와 동기생 간의 절차탁마를 위한 동기회 활동, 정서함양 및 취미생활을 위한 과외활동 및 축제’ 등 다양한 활동을 경험한다.

나는 생도대장으로 부임해서 1년 이후에나 있을 즉 1987년 12월 16일의 대통령 선거에 대한 개념정립을 이미 마음 속에 확고히 하고 있었다. 육사생도들에게 멋있는 선거를  치르게 하고픈 마음에서였다. 그래서 훈육책임 장교들에게는 1년 이전부터 미리 선거에 대한 나의 신념을 분명히 밝혔다. 지금도 이것이야말로 선거에 관한 참교육으로 생각한다.

나는 이런 입장을 밝혔다. 

“과거 선거때가 되면 명분 삼아 실시했던 교육이 그 시대적인 정서라 말할 수도 있겠지만 이로 인해 특히 뜻있는 젊은 청년 군인들에게는 내심 크나큰 실망 내지 마음의 상처까지 주었던 일이 많았기에 나는 이러한 과오를 이곳 생도대에서 만큼은 절대 되풀이 하지 않을 것이다. 선거에 관한 한 내가 모든 책임을 질 테니 앞으로 훈육관을 비롯한 생도대 근무 장교들은 선거의 ‘선’자도 생각하거나 얘기하지 말고 오직 기본임무에만 전념하고 충실하기 바란다. 왜냐하면 존경받는 훈육관이 아무리 차원 높게 선거에 관한 문제를 얘기를 한다 해도 그 순간부터 순수한 생도들에게는 훈육관에 대한 실망감으로 존경과 신뢰는 떨어지게 된다. 나는 신뢰와 존경받아야 할 훈육관들을 그런 대상으로 절대로 전락시키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장차 1987년 12월 대통령선거 과정에서 생도들에게 실망과 마음의 상처를 준다면 비록 그동안 우리가 생도교육 전반에 걸쳐 모든 일을 완벽하게 잘했어도 그 한 가지 사실로 그간 이룩했던 모든 성과는 한 순간에 수포로 돌아갈 것이다. 나는 장차 대통령선거 문제를 교육성과의 사활이 걸린 중요한 과제로 보고 있음을 분명히 밝힌다.”

그 이후 군에서 내려오는 좋은 의미의 각종 관련 공문 지시일지라도 나는 일체 언급하지 않았다. 선거가 임박한 약 3개월 전인 87년 9월경에 생도대 장교들과 생도들에게 공개적으로 한마디 언급했다.

“앞으로 대통령선거는 군의 통수권자를 결정하는 중요한 행사인데 우리는 진정 고민해서 선택해야만 한다. 나는 육군 준장의 계급과 생도대장이라는 직책을 걸고 어느 누구도 여러분의 기본권을 침해하는 간섭을 절대로 허용하지 않을 것이다.” 이 말은 특히 생도들에게는 무슨 소리인지 알듯 말듯하게 들렸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 후 선거에 임박해서 전 생도를 대상으로 선거 관련 분명한 나의 생각을 직접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얘기했다.

1. “생도들은 각종 신문을 읽어라. 그 속에서 올바른 답을 얻을 수 있다고 본다. 노태우 김대중 김영삼 김종필 등 4명의 후보들에 대한 상세한 자료들이 모두 있으니 올바른 선택을 위해서 매일 신문을 열심히 읽어라.” 생도대장으로 부임했을 때 1학년 생도들에게는 신문구독이 금지되어 있음을 알고 나는 1학년일수록 신문을 읽어야 한다며 1학년 생도들의 일간 신문구독을 당장 허용했다. 각종 신문을 모두 중대 홀에 비치했다.

2. “관훈 토론, 각종 심야토론의 녹화 자료들은 가장 객관성이 있다. 그리고 4명의 후보들이 도마 위에서 난도질까지 당하는 모습들이 담겨진 자료로서 그 어떤 자료보다 올바른 판단에 좋은 참고가 될 것으로 본다. 각 중대 홀에 각 시간대로 항상 볼 수 있게 조치했으니 올바른 판단을 희망하는 생도들은 본인이 선택한 시간에 자유롭게 청취토록해라.” 

3. “이 자리에서 분명히 얘기하는데 선거에 관한 한 어느 누구도 여러분의 기본권을 침해할 수 없다. 나는 장군계급과 생도대장의 직책을 걸고 이를 확실히 지켜줄 것이다. 선거 후에 여러분들이 가족 친지 그리고 친구들을 만날 텐데 그때 무엇보다 떳떳할 수 있어야만 한다. 누가 묻기를, “야, 너희들 어용 투표했지?” 했을 때 양심의 가책 없이 “웃기는 소리 말아라” 하고 몇 마디 충고까지 할 수 있어야 하며 이렇게 하여 여러분의 명예와 자존심이 지켜지는 것이다. 그 대신에 여러분들은 진정 고민하는 자세로 ‘대통령 선택의 사명의식’을 견지해야만 한다.”

이상 3가지가 1200명 생도들을 대상으로 한 내 얘기의 골자였다.

그 이외 조치로서 군에서 내려오는 각종 홍보자료들은 일체 덮어버렸다. 물론 좋은 자료들도 있었다. 그러나 상기 3가지의 객관적인 얘기 이상의 자료는 없다고 보았다. 모든 사물에는 양면성이 있는데 한 면만의 얘기는 나중에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게 된다. 외출이나 휴가 시 사회에서 듣는 얘기는 군에서 듣던 얘기와는 정반대일 수 있으며 그때 사람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질 수 있다. 그래서 바른 판단을 할 수 있는 객관적이며 비교적 정확한 자료를 주어서 본인이 스스로의 올바른 선택을 하게 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교육으로 보았다.

당시 학교장은 생도들 정신훈화를 하라고 누차 지시했다. 한마디로 노태우 후보를 선택하는 교육을 차원 높게 하라는 요구인 것이다. 그런 요구나 지시를 내가 응할 리가 절대로 없었다. 그러니 그분은 마음속으로는 기분이 상했을 것이다.흔히 하는 선거 얘기는 일본을 봐도 집권당의 장기 집권으로 정치 사회 경제가 안정되었다는 내용과 국가안보를 위해서는 어느 누가 되어야 하는가 하는 내용들이다.

이런 말들이 전적으로 거짓은 아니지만 우선 객관성이 결여되었고 설득력도 약할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강요로 느껴진다면 오히려 없느니 만도 못하다고 보았다. 내 경우, 하려든 일도 강요를 받게 되면 절대로 하지 않는 오기가 있다. 이는 누구에게나 공통점일 것이다.

훗날 간담회를 통해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교수들, 생도들 얘기를 들을 기회가 있었다. “생도대장이 다른 것은 몰라도 이번 선거에 대한 문제를 풀어 나가기에는 무척 어려울 것으로 여겼으며 심지어 혹시 실망으로 이어지면 어쩌나 하는 염려도 많이들 했다. 하지만 상상 외의 멋있는 방법으로 해결했기에 생도들은 보람과 긍지를 느꼈다”는 생도들의 말과 “생도대장이 누구를 찍으라는 말은 전혀 없었지만 투표 결과는 생도 다수가 노태우 후보를 선택했다는 사실과 한편, 생도들 지지투표 결과는 어떤 상징성이 있는데 노태우 후보에 대한 지지율이 저조했다면 생도대장 신상에 큰 영향이 있을 것으로 염려했다”는 교수부 지역 장교들의 얘기들이었다.

나는 예상 못했던 부가가치들이 많이 생겼다고 보아 당시 기분이 좋았다. 특히 당시 보안부대에서 조용했던 이유가 바로 이런 절대적인 지지득표 결과였던 것이다. 당시 선거행사는 내가 생도대장 근무 중 실행했던 아니 군 생활 기간 가장 멋있는 일화 중의 하나였다.

이것은 생도대장이었던 나, 생도대 장교들 그리고 생도들 모두가 영원히 간직할 수 있는 분명 아름답고 보람 있는 소중한 추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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