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승우 칼럼] 50년 전 군대생활 지금 돌이켜보니···”생각하는 군대라야 이길 수 있다”
[아시아엔=최승우 전 육군인사참모부장, 전 예산군수] 지난 3월 초 철원의 한 사단을 방문했다. 내가 육사 생도대장 시절 3학년이던 후배가 어느덧 사단장이 돼 부대를 지휘하고 있었다. 30년의 한 세대가 흐른 뒤 늠름한 장군으로 성장·발전한 후배를 보니 여간 뿌듯한 게 아니다.
나는 사단장을 비롯한 참모들과 내 군대생활 경험을 들려주며 후배들에게 보탬이 되길 진심으로 바랬다. 이날 나는 후배들에게 이 말을 특히 강조했다. “생각하는 군인이라야 나라를 구하고 개인에게는 밝은 미래가 약속돼 있다.”
상명하복의 특수관계로 맺어진 군대에서 이 말은 일견 모순된 것으로 오해될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35년의 군대생활 동안 ‘생각하는 것’과 ‘생각하는 힘’의 중요성을 한시도 잊지 않았다고 감히 자부한다.
50년 전 수경사(현 수방사) 중대장 시절의 일이다. “여러분들 수고 많았소. 특히 중대장들 추운 날씨에 병사들 관리하느라고 수고 많았고 하지만 부하들이 추위에 얼은 동태새끼가 되는지도 모르고 두 다리 쭉 펴고 편하게 잠을 자는 사람도 있는데 대단히 유감스러운 일이요. 각성해요.”
대대장은 회의를 마친 후 훈시 중에 매우 격앙된 어조로 이렇게 말했다. 당시는 중대장 부임 후 맞은 첫 겨울이었다. 나는 속으로 ‘아니 그런 사람이 어디 있지? 뭔지 잘못된 것 아닌가? 사실이라면 그럼 누구보고 하는 얘기지?’ 하고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한편 의구심을 떨치지 못했다.
바로 우리 중대를 두고 한 말이었다. 나는 기분이 몹시 좋지 않았다. 나는 회의를 마치고 청와대 뒤 북악산 정상에 위치한 대대장실로 직행했다.
“대대장님 오늘 회의 때 부하들이 얼은 동태 되는데 편안히 잠만 자고 있다고 하셨는데, 저희 중대를 두고 하신 얘기로 알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 보고를 드리기 위해 왔습니다.” 나를 맞는 대대장의 심기는 몹시 불편해 보였다. 대대장은 퉁명스런 어투로, “그래 얘기해 봐” 했다. 나는 모욕당한 기분에 몹시 흥분해 있었다.
“대대장님, 실내온도는 섭씨 18도를 적정기준으로 보는데 저는 30도 까지도 만들 수 있습니다.” 대대장은 어안이 벙벙한 표정이다. 나는 계속했다.
“대대장님, 저는 온도계가 터지게도 만들 수 있습니다.”
그는 무슨 말인지 이해 못하는 듯했다. 평소 같으면 분명히 큰 소리를 하고도 남을 분인데 조용했다. 한 번에 몰아서 한 방 날리려는 속셈인지도 몰랐다. 나는 대대장이 “정신 나간 소리 한다”고 포문을 열기 전에 본론으로 들어갔다.
“대대장님, 새벽녘 2~4시 사이에 소초에 들어가신 적이 있습니까? 특히 온도계의 위치를 유심히 보신 적이 있습니까? 저는 거의 매일 그 시간대에 순찰을 합니다. 소초 상황병의 위치는 난로근처에 있습니다. 통상 온도계는 난로 연통 근처 천정 밑에 매달려 있습니다. 당연히 실내온도 18도 유지는 매우 쉽고 그 이상까지도 가능합니다. 온도계를 난로 바로 위에 놓으면 터질 정도까지 올라갑니다. 우리 중대도 난로 근처에 놓으면 18도 유지는 언제나 가능합니다. 그러나 저는 그렇게 하고 싶지 않습니다. 저는 중대 내 모든 소초의 온도계는 소초 내에서 가장 추운 곳에 위치하도록 지시했습니다. 그럴 경우 18도 유지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합니다. 대야에 물을 담아 내무반 바닥에 놓아두면 새벽녘 특히 탄을 새로 갈아넣을 때는 온도가 심히 낮아져 살얼음까지 얼게 됩니다. 그래도 내무반 온도가 18도가 되어야 합니까? 제 말을 못 믿으시면 그 시간에 와 보십시오. 저는 현장에서 잠도 자보고 그 시간에 자주 순찰을 하기에 분명히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할 말이 있을 리가 없다. 겨울에는 산악지역에 위치한 소초의 실내 온도는 야간 실내온도를 그래프로 표시하여 보고를 했다. 우리 중대 온도 그래프는 붉은 줄로 표시된 0도 선을 상하로 오르내리는 표시였고 다른 중대는 푸른 줄로 표시된 18도에서 25도 대를 오르내렸다. 대대장은 매일 그래프식 기록으로 보고받다 보니 결국 회의 때 폭발한 것이다. 나는 18도에 관계없이 사실대로 보고하도록 지시했기에 그런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그때만 해도 조개탄도 아니고 석탄 가루를 물에 개어 삽으로 난로에 넣는데 상황병이 경험이 적은 신병이면 탄 교체시기를 놓치거나 교체 중 그대로 꺼뜨려 내무반 온도는 그야말로 영하권으로 내려갔다. 그럴 때는 고참병들이 비상용 목재를 난로에 넣어 위기를 극복하는 것을 나는 새벽녘에 자주 보았다.
나의 말이 모두가 분명한 사실이었기에 대대장의 신뢰는 되레 깊어졌다. 그 후 그와 유사한 일을 수차 경험하며 서로 깊이 신뢰하며 교류할?수 있었다. 그 분 수하에서 근무하는 동안 서로의 개성 차이로 자주 충돌했지만 그는 내 개성을 인정해 주었다.
그 뒤 15년 후 나는 장군으로 진급하여 육사에서 다시 그 분과 근무하게 되었다. 그분이 육사교장 재직 시 내가 생도대장으로 부임한 것이다. 그분은 점심식사를 일찍 끝내고는 꼭 나 하고만 바둑을 두자고 했다. 왜냐하면 그동안 소위 ‘정치바둑’으로 자신을 이기려는 하급자는 아무도 없었는데 새로 부임한 생도대장 하고 한번 바둑을 두어보니 내가 절대 양보 없이 3점 접바둑인데도 바득바득 잡으려고 대드니 아마도 그 재미를 느낀 모양이었다.
어느 날 운 좋게 나는 대마를 잡았다. 그분은 한수를 물르자 했다. 나는 작심을 하고 안 된다고 버티다 결국 물러 드려야 했다. 얼마 안 있어 다시 몇 마리 잡았지만 결국 또 무르게 되었다. 내 심기는 폭발 일보 직전, 몹시 불편했다. 또 얼마 후에 바둑을 무르기에 나는 화가 치밀어 조용히 일어서서 그분을 내려다보며 공손하고 나지막 하게, 하지만 감정어린 심정으로 얘기했다.
“교장님! 오늘 정말 말씀 드리겠습니다. 접바둑이지만 저도 잡는 재미를 느껴야 하는데 오늘 경우 한판에 3번씩이나 무르셨는데 이건 아닙니다. 그동안 참았습니다. 그리고 저는 하수지만 생각하시고 바둑알을 놓아야지 놨다 뗐다 그리고 놓으려다 떼었다 하는 손동작은 상대를 매우 헷갈리게 합니다. 솔직히 좀 언짢기도 합니다. 저는 그동안 이해하려고 노력했지만 이제는 못하겠습니다. 오늘 바둑은 더 못 두겠습니다.” 나의 단호한 표현이었다고 기억된다.
다행히도 과거 70년대 중반 소령 시절 어떤 선배와의 대국 때 너무나 야속하게 수차례나 바둑을 무르기에 순간 바둑판을 쓸어버렸던 ‘뼈아픈 추억’이 있었기에 그날 바둑판을 엎지는 않았다.
전혀 예기치 못했던 내 모습에 교장님은 몹시 당황했다.
“야, 생도대장 앉아!”
“교장님! 말씀드린 두 가지, ‘무르기 없기’와 ‘사전에 생각하고 바둑돌 놓기’를 안 고치시면 앞으로 저는 바둑은 못 두겠습니다.” 단호한 어조로 조용히 얘기를 했다. 그랬더니 잠시 후 “그래, 그렇게 하자! 자 앉아!” 나는 다시 앉았다.
그후 그의 바둑 버릇은 고쳐졌고 더 이상 문제가 일어나지 않았다. 그분은 15년 전 중대장 시절 온도계 사건으로 이미 내 개성을 확실히 파악·신뢰했다. 그 후 장군 위치에 있는 나를 확실히 알고 있었기에 나를 받아주었던 것이다. 그분과는 여전히 좋은 인간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오해는, 반드시 풀어야 하며, 풀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 좋아야 할 사이인데 어떤 오해로 인해 이를 간직한 채 헤어지면 서로의 불행이다.
서로의 어떤 차이는 항상 있게 마련이며 상급자나 하급자의 위치에서 이를 서로 존중하고 인정하며 소통하고 이해하려는 자세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이는 개인문제를 넘어 조직의 문제로도 이어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