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승우 칼럼] “그때 가봐야 알겠다”
[아시아엔=최승우 전 예산군수, 육군 제17사단장] 1965년 나는 육사 졸업과 임관 그리고 초등군사반(OBC) 6개월 수료 후 강원도 양구 지역에 소대장으로 부임했다. 그해 10월 초 故 강재구 소령(당시 대위)의 悲報를 신문에서 읽었다. 처음에는 강재구 대위가 누군지 알지도 못했다. 그런데 신문의 여러 기사와 사설까지 읽다보니 간과할 수 없는 사실들을 발견하게 되어 계속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 이후로 나는?당시 고인이 된 그 분과 대화를 해보는 습관이 생겼다. 물론 혼자서 하는 自問自答이었다.
나는 혼자 생각에 “어떻게 수류탄을 가슴에 품고 自爆을 하나??대단한 용기다, 최승우! 너는 과연 부하를 교육할 때 부하가 실수를 했다면 그 수류탄을 네가 안고 自爆할 수 있겠는가?” 라고 스스로에게 질문을 해봤다. 그렇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할 수 있다”는 대답을 도저히 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나는 비겁한 사람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인가?
나는 다시 질문을 해보았다. “강 선배님! 만약에 부하의 실수와 거의 동시에(물론 수류탄 터지기 직전) 자신이 ‘덮쳐야 되나? 말아야 되나?’ 라는 생각과 고민을 순간 했다면 과연 덮칠 수 있었겠습니까?”라고 질문을 해봤다.?그리고 그 질문에 강재구 소령이 “그래도 덮쳤다!”라고 한다면 그것은 완전 거짓말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수류탄은 3~4초면 폭발하는데 만약 그 짧은 순간에 생각과 고민을 했다면, 즉 그 것을 덮칠 경우, 자신의 소중한 육신이 수류탄 파편에 의해서 갈기갈기 찢기는 비참하게 파열된다는 사실을 상상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또한 사랑하는 가족을 생각했을 터였고, 만약 그것을 덮치지 않는다면 육사까지 나온 중대장이 부하들은 죽게 놔두고 저만 살려고 현장을 도피한 비겁한 자로 낙인이 찍혀 평생 지탄을 받으며 양심의 무거운 꼬리표를 달고 살게 될 것이라고 생각을 했을 것이다. 또 이런 고민 속에서 순간적으로 마음의 갈등은 요동을 치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그 사이에 3~4초는 순식간에 지나가서 결국 수류탄 폭발로 부하들은 사망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 그런 至高의 犧牲精神과 勇氣가 나올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과 고민은 계속 나의 뇌리를 때렸다. 나는 이 문제를 도저히 풀 수가 없었다. 그래서 한동안 깊은 번민을 하고 있었는데 뜻밖에 당시 육사 교장이던 정래혁 장군께서 책 한권을 보내 주셨다. 평소 생도 4학년 때부터 나를 많이 사랑해 주셨고 특히 김신조 사건 직후 2군사령관 재직 때 대구에서 상경해 나의 결혼식 주례를 서주셨던 분이다.
그 책은 당시에 발행되었던 故 강재구 소령의 日記였으며 나는 결국 그 일기 속에서 풀지 못했던 해답을 얻었다. 그 일기는 생도 때부터 散華하기 전까지의 내용이었는데 일기 내용은 구구절절 철저한 국가관, 자기반성과 성찰, 철저한 공익정신,?개인적인 고민,?그리고 문제의식을 올바로 갖고 군을 사랑하는 진정한 마음 등이?일관되게 기록되어 있었던 것으로 기억 난다.?나는 일기를 읽으며 나도 모르게 “아!” 하는 탄성을 지르게 되었다. 도저히 못 풀었던 답을 얻었던 것이다.
즉, 결론은 평소 잠재의식 가운데 축적되고 내재되었던 무형의 가치들이 위기의 순간에 생각의 여지도 없이 자연 반사적으로 표출되어 무의식 가운데 행동으로 나타났던 것임을 깨닫게 되었다. 그때의 나의 뇌까림은 “그러면 그렇지! 자나깨나 간직했던 使命意識이 잠재의식 속에서 분출되어 자기도 모르게 행동으로 표출된 것이었구나”라는 나 나름대로의 답이었던 것이다.
평소의 일거수일투족의 행위는 자신도 모르게 잠재의식 속에 축적되어 있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위대한 힘을 발휘하게 된다는 사실을 나는 20대 중반 나이에 고 강재구 소령의 일기를 읽으며 깊이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강재구 소령의 그림자 정도라도 닮기 위한 노력을 이제부터라도 한번 해보자” 하고 다짐을 하고 군 생활을 해왔다.
그러나 그런 숭고한 삶이 단순히 결심했다고 쉽게 이루어지지는 않는다고 생각했다. 일반적으로 우리에게 어떤 위기가 닥쳐왔을 때 인간의 본능상 위기로부터 도피하는 생각과 행동을 하기 마련이다. 모든 일은 함부로 자신할 수 없다. 오직 “그때 가봐야 알 수 있다”는 말처럼 강재구 소령의 숭고한 행위와 비슷하게나마 할 수 있으려면 일상생활 속에서 늘 가치관을 올바르게 유지하려는 노력을 부단히 하고 또 늘 스스로를 새롭게 변화시키려는?생각과 행동을?축적하다 보면 어떤 순간에 분명히 가치와 보람을 느끼는 행동이 있으리라고 확신했다.
나는 이런 생각을 해왔다. 꼭 목숨을 바치는 것만이 최고의 가치는 아니란 것이다. 과거 군에서는 진지 공사를 많이 했다. 그때마다 상급 지휘관들로부터 “이 장소는 앞으로 전시에 우리가 적과 싸우다 목숨을 바쳐야 할 장소다”라는 말을 많이 들었다. 말인즉슨 당연히 죽어줘야 하는 장소로 정하고 하는 얘기였던 것이다.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아니, 왜 여기를 미리 죽을 장소로 정해야 하나? 여기서 적과 싸워 이겨 승리의 축배를 드는 장소로 만들어야 한다는 말은 왜 못하지?” 하며 스스로에게 반문하곤 했다. 그런 상황에서 나는 죽자는 얘기는 안했다. 죽게 되면 그때 그 장소에서 죽는 것이지 함부로 죽자는 얘기는 미리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였다. 평소에는 살기 위해 전력투구해야 한다.
그런 생각해온 나는, 부하들에게도 이렇게 나의 생각을 이야기하곤 했다. “목숨 바친다는 얘기를 쉽게 외치지 말라. 목숨을 바치는 일은 때와 장소를 가려서 말없이 실천하면 되는 것이지 함부로 외쳐댈 일이 아니다. 잡견을 봐라. 쓸데없이 마구 요란하게 짖기만 하지만 실제 물어야 할 순간에는 꼬리를 감추고 깨갱대며 도망 가버린다. 그렇지만 명견은 함부로 안 짖지만 자신이 꼭 물어야 할 때와 장소에서는 여지없이 콱 물어 버린다. 충성, 목숨, 국가 등 이런 고귀한 용어는 함부로 외쳐댈 용어가 결코 아니다. 역사적으로 위대한 선조들의 경우 함부로 ‘목숨’을 외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 같은 교훈을 마음에 새기며 초급장교 시절부터 살아온 나 자신도 얼마든지 비겁한 자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이 항상 내재하고 있음을 깨닫고 있었다. 만약 누군가가 나에게 “수류탄 사고” 관련 질문을 한다면 나는 “그때 가봐야 알겠다”고 분명히 답할 것이다. 이는 평소 내면에 가치관 축적을 위한 노력을 강재구 소령 같이 지속한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나의 답이다. 이 어구를 내가 쓰게 되었던 한 이야기가 있다.
병자호란 이전에 있었던 일화다.
동네 우물가에는 아낙네들이 모여서 빨래도 하고 물도 기르고 했는데 마침 시대가 뒤숭숭하니 얘기가 자연히 근심 걱정이 소재가 되었다.
“뙤놈들이 쳐들어 온다는데 그때 우리는 어떻게 하냐?”는 얘기였다. 모두들 하는 얘기가 욕보기 전에 혀 깨물고 죽겠다, 목매달아 죽겠다, 물에 빠져 죽겠다는 등 모두 죽겠다는 얘기뿐이었다. 그런데 그 중 한 여인이 아무 말을 안 하고 있다가 질책성 질문을 받자 조용히 말했다. “나는 그때 가봐야 알겠다”고 답했다. 동시에 조롱이 쏟아졌다. 그 후 불행하게도 병자호란이 발생하자 죽겠다던 여인들은 모두 능욕당하고 잡혀갔고 오직 “그때 가봐야 알겠다”고 했던 여인만이 자결을 했다고 한다.
이 이야기를 통해 일찌기 30대에 깨달음을 얻은 뒤부터는 나도 “그때 가봐야 알겠다”는 말을 내 나름 비중을 두고 신중히 표현해왔다. 비록 자신 있다 해도 말을 함부로 해서도 안 되겠지만 “그때 가봐야 알겠다”는 말에 무게를 두고 꾸준히 노력하고 있다. 나는 만약 강재구 소령 사건이 없었더라면 ‘오늘날의 나’와는 약간 ‘좀 다른 나’가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간혹 했다.
아무리 좋은 경험요소가 발생해도 이를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자기 것으로 만들지 못한다면 바람결 교훈일 뿐이다. 자신에게 다가오는 진정한 복(행운)은 물론, 멀리 지나가는 복(행운)도 잡을 수 있어야 한다. 나는 모든 것으로부터 느끼고 배우려는 노력을 지금도 게을리 하지 않고 있다. 그러기에 남에게는 하찮은 요소가 내게는 보물이 될 수 있다는 확신도 갖게 되었다. 이제는 모든 유무형 요소가 스승이라는 옛 말씀을 확실히 깨닫게 되었다.
평소 생각과 고민을 하고 개성을 인정하고 관리해 주는 풍토에서 훌륭한 인재는 탄생한다. 그런데 우리 군대는 ‘왜’라는 이유도 못 대고 그저 기계와 같은 인간으로 육성되어 왔다. 인재육성은 개성관리가 근본인데 고유의 개성도 잊은 채 살다가 중요성이 무엇인지도 깨닫지 못한다면 이는 백조새끼일 수도 있는데 오리새끼인 줄만 알고 크는 것과 다음 아니다.
나는 ‘진정한 군인의 길은 진정한 인간의 길’임을 깨달을 수 있도록 철없는 어렸을 적부터 엄한 교육 중에도 진정한 사랑을 깨닫게 해주신 부모님께 깊이 감사하고 있다. 부모님은 내 개성을 잘 키워주셨으며 책을 많이 읽어 생각의 폭과 깊이를 형성토록 해주셨다. 아마도 그로부터 나는 내 자신을 알려고 노력했던 습관이 어렸을 적부터 발아돼 형성되어 왔던 것 같다.
특히 감사한 것은 보통 지나치고 그냥 넘길 수 있던 고 강재구 소령 사건에서 귀중한 깨달음을 얻게 된 것이다. 아직도 나는, 어떤 사안에 대해 자신 있게 표현하기보다는 “그때 가봐야 알겠다”는 말을 할 것이다. ‘우물가 한 여인의 일화’는 앞으로도 내게는 소중한 교훈적인 일화로 간직되어 행동 실천의 기본 요소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