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주년 국군의날②] ‘소신과 책임’ 없는 상하관계는 ‘무용지물’

국방부 청사
오는 10월 1일은 제73회 국군의 날입니다. 한국군이 청장년기를 지나 노년의 나이에 접어들었습니다. 박정희 이후 전두환·노태우 등 군출신 대통령 30년과 이후 김영삼 이후 민간출신 대통령 30년, 군을 빼놓고는 한국 현대사를 얘기하기 어려운 것도 사실입니다. <아시아엔>은 국군의 날을 맞아 누구보다 군 시절 열정을 쏟고 여전히 애정과 신뢰를 보내는 분들의 고언과 조언, 격려와 질책을 전합니다. 군문을 떠난 지 20~30년 된 70대, 80대 노병들에 젊은 군에 이르기까지 군 선후배들과 소통하는 이들의 목소리를 통해 우리 군의 내일을 함께 준비하기 위해서입니다. 필진 가운데는 현역시절 군문제에 대해 대척점의 위치에 있던 분들도 있습니다. 온고지신(溫故知新)의 정신과 맥아더 장군의 말을 되새겨보는 오늘입니다. “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다.” <편집자>

[아시아엔=최승우 전 육군본부인사참모부장, 17사단장 역임] 필자가 수경사 33대대 1중대장으로 재직 때 얘기다. 반세기가 흘렀다. 그때나 지금이나 군은 전쟁이란 가장 비이성적이고 불합리한 상황에 대비해 존재하는 집단이다. 그런만큼 평소 빈틈없는 훈련과 합리적, 이성적인 부대운용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50년 전 小話를 소환해낸 까닭이다.

“여러분들 수고 많았소. 특히 중대장들 추운 날씨에 병사들 관리하느라고 수고 많았고. 하지만 부하들이 추위에 얼은 동태새끼가 되는지도 모르고 저는 두 다리 쭉 펴고 편하게 잠을 자는 사람도 있는데 대단히 유감스러운 일이요. 각성해요.”

대대장이 훈시 중에 격앙된 어조로 말했다. 당시는 중대장 부임 후 처음 맞는 겨울이었다. 나는 속으로 ‘그런 사람이 어디 있지? 뭔가 잘못된 것 아닌가? 사실이라면 그럼 누구보고 하는 얘기지?’ 하고 의구심을 금치 못했다. 잠시 후 대대장 발언이 나를 겨냥한 것을 알고서 나는 기분이 몹시 안좋았다. 대대장은 회의 후 북악산 정상에 위치한 대대장실로 복귀했다. 나는 곧바로 대대장한테 달려갔다.

“대대장님, 오늘 회의 시 부하들이 얼은 동태새끼 되는데 편안히 잠만 자고 있는 자가 있다는 말씀이 저를 두고 하신 얘기로 생각 드는데 이에 대한 보고를 드리기 위해 왔습니다.” 나를 맞는 대대장 심기는 몹시 불편해 보였다. 대대장은 퉁명스런 어투로, “그래 얘기해 봐” 했다. 나도 흥분해 있었다.

“대대장님, 실내온도는 섭씨 18도를 적정기준으로 보는데 저는 30도까지도 만들 수 있습니다.” 무슨 말인지 그가 알 리가 없다. 그냥 쳐다보고만 있다. 나는 계속했다. “대대장님, 저는 온도계가 터지게까지 만들 수도 있습니다.”

점점 알 수 없다는 표정이다. 분명히 큰 소리를 하고도 남을 분인데 아직까지 조용했다. 한번에 몰아서 한 방에 날리려는 속셈인지도 몰랐다. 나는 대대장이 정신 나간 소리 한다고 포문을 열기 전에 본론으로 들어갔다.

“대대장님, 새벽녘 2~4시 사이에 소초 내무반에 들어가보신 적 있습니까? 특히 온도계 위치를 유심히 보신 적 있습니까? 저는 거의 매일 그 시간대에 순찰을 합니다. 소초 상황 병사의 위치는 난로 근처 옆에 있습니다. 통상 온도계는 난로 연통 근처 천정 밑에 매달려 있습니다. 당연히 실내온도 18도 유지는 매우 쉽고 연통에 연해서 달아놓으면 25도를 유지할 수 있고 30도까지 오르게 되어있습니다. 온도계를 난로 바로 위에 놓으면 터질 정도까지 온도가 올라갑니다. 저희 중대도 난로 근처에 놓으면 18도 유지는 항상 가능합니다. 그러나 저는 그렇게 하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저는 중대 내 모든 방카 소초의 온도계는 소초 내에서 가장 추운 곳에 위치하도록 지시했습니다. 그럴 경우 18도 유지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합니다. 특히 연탄을 물에 개어서 넣고 공기 구멍을 뚫어 갈아 넣을 때 온도는 자연히 영하권 훨씬 이하로 떨어집니다. 시험 삼아 대야에 물을 담아 내무반 바닥에 놓아두면 새벽녘 특히 탄을 새로 갈아 넣은 직후에는 온도가 몹시 낮아져서 살얼음까지 얼게 되는데 그래도 내무반 온도가 18도가 되어야 합니까? 정 제 말을 못 믿으신다면 그 시간대에 와 보십시오. 저는 불규칙적으로 새로 연탄을 갈아 넣는 새벽 시간대에 맞춰 자주 순찰을 해왔기에 이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대대장님께서도 내무반 안의 대야 속 살얼음을 보실 수 있다고 분명히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할 말이 있을 리가 없다. 겨울에는 산악지역에 위치한 소초의 실내온도는 야간 실내온도를 그래프로 표시하여 보고를 했다. 우리 중대 소초 내무반의 새벽시간대 온도 그래프는 붉은 줄로 표시된 ‘섭씨 0° 기준선’을 중심으로 상하로 오르내리는 표시였다. 대대장은 타 중대지역 소초들이 푸른 줄로 표시된 ‘섭씨18° 기준선’의 온도범위를 오르내리는 표시를 대대장에게 보고하다 보니 결국 회의 시에 폭발한 것이다. 우리 중대에선 기록을 사실대로 보고했기에 그런 사태가 벌어진 것이었다.

당시만 해도 조개탄도 아니고 석탄 가루를 물에 개어서 삽으로 난로에 넣는데 상황병이 신병일 경우, 탄 교체시기를 놓치거나 교체 중 불을 꺼트려 내무반 온도는 영하권으로 내려가기 일쑤였다.

나의 말 모두 사실이었기에 대대장은 나를 신뢰하는 듯했다. 대대장과의 신뢰는 갈수록 깊어졌다. 그 대대장 밑에서 근무하는 동안 기억에서 이미 사라진 ‘개성끼리의 충돌’은 좀 있었겠지만, 내 개성을 인정해 주던 그의 폭 넓은 ‘신뢰와 이해’로 나의 중대장 근무는 보람과 아름다운 추억으로 간직돼 있다.
나는 1986년 장군으로 진급했다. 장군 첫 보직인 7사단 부사단장직으로 6개월 근무 후, 육사 생도대장으로 이동했다. 거기서 육사교장 C 중장을 다시 만나게 되었다. 과거 수경사 33대대장과 중대장으로 만난 후 이번에는 교장과 생도대장으로 만나게 된 것이다.

생도대장 부임 수개월 후부터 그분은 오찬을 일찍 끝내고는 꼭 나하고 바둑을 두자고 했다. 왜냐하면 그동안 소위 ‘정치바둑’으로 자신을 이기려는 하급자는 아무도 없었는데 새로 생도대장으로 부임한 나와 바둑을 두어보니 내가 절대 양보 없이 ‘접바둑’인데도 바득바득 공격적으로 대드니 아마도 ‘별미’로 느낀 모양이었다.

어느 날 바둑을 두는데 운 좋게 나는 대마를 잡았다. 그는 한수를 무르자 하기에 나는 작심 하고 안된다고 했지만 결국 물러야 했다. 얼마 안 있어 다시 몇 잡았지만 결국 또 무르게 되었다. 내 심기는 폭발 일보 직전으로 몹시 불편했다. 또 얼마 안가 무르기에 나는 내심 화가 치밀어 조용히 일어서서 그분을 내려다보며 공손히 나지막하게, 그러나 감정을 담아 얘기했다.

“교장님! 오늘은 정말 솔직히 말씀 드리겠습니다. 비록 접바둑이지만 저도 잡는 재미를 느껴야 하는데 오늘 한판에 3번씩이나 무르셨습니다. 이건 아닙니다. 그동안 참았습니다. 저는 비록 하수지만 생각하고 바둑알을 놓으셔야지 놓았다 떼었다 그리고 놓으려다 떼었다 하시는 손동작은 상대를 매우 헷갈리게 합니다. 솔직히 좀 언짢기도 합니다. 저는 그동안 이해하려고 노력했지만 이제는 못하겠습니다. 오늘 바둑은 못 두겠습니다.” 솔직하고 단호한 표현이었다고 기억한다.

다행히도 과거 70년대 중반 소령 시절 직속상관 선배와 대국할 때도 수차례나 바둑을 무르기에 한순간 바둑판을 두 손으로 쓸어버렸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 뼈아픈 추억을 내 나름 반성을 한 터여서 바둑판을 뒤엎는 일은 하지 않았다.

예기치 못했던 내 모습에 교장은 몹시 당황했다.

“야, 생도대장 앉아!”
“교장님! 말씀드린 두 가지, ‘무르기 없기’와 ‘사전에 생각하고 바둑돌 놓기’를 안 고치시면 앞으로 저는 바둑은 못 두겠습니다.” 단호한 어조로 조용히 얘기했다. 그랬더니 잠시 후 그는 “그래, 그렇게 하자! 자 앉아!” 했다. 나는 다시 앉았다.

그 후 그의 습관은 고쳐졌고, 문제없는 바둑이 되었다. 그와 나는 대대장과 중대장으로 근무하면서 이미 서로간 신뢰가 쌓여 있었기에 나는 쓴소리를 아끼지 않고 소신 있게 나섰고, 그는 내 이런 태도를 기꺼이 받아줬던 것이 아닌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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