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주년 국군의날③] 대통령 앞에서 정부정책 ‘정면 비판’

1989년 3월 21일 육사 제45기 졸업식에서 노태우 대통령과 민병돈 교장. 민 교장은 대통령이 임석한 자리에서 노태우 정부의 북방정책 등에 대해 정면 비판했다.
오는 10월 1일은 제73회 국군의 날입니다. 한국군이 청장년기를 지나 노년의 나이에 접어들었습니다. 박정희 이후 전두환·노태우 등 군출신 대통령 30년과 이후 김영삼 이후 민간출신 대통령 30년, 군을 빼놓고는 한국 현대사를 얘기하기 어려운 것도 사실입니다. <아시아엔>은 국군의 날을 맞아 누구보다 군 시절 열정을 쏟고 여전히 애정과 신뢰를 보내는 분들의 고언과 조언, 격려와 질책을 전합니다. 군문을 떠난 지 20~30년 된 70대, 80대 노병들에 젊은 군에 이르기까지 군 선후배들과 소통하는 이들의 목소리를 통해 우리 군의 내일을 함께 준비하기 위해서입니다. 필진 가운데는 현역시절 군문제에 대해 대척점의 위치에 있던 분들도 있습니다. 온고지신(溫故知新)의 정신과 맥아더 장군의 말을 되새겨보는 오늘입니다. “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다.” <편집자>

1988년 2월 노태우 6공 정부 출범 1년 남짓 지난 89년 3월 21일. 육사 45기 졸업식이 열린 태릉 육사교정에서 민병돈 교장의 졸업식 식사는 군 안팎에 파장을 일으켰다. 정부의 북방 및 대북정책 등에 대해 현직 대통령 앞에서 해 정면으로 비판했기 때문이다. 당시 신문들은 민 교장의 졸업식사 전문과 해설기사를 아래와 같은 제목을 달아 보도했다.

‘주목 끈 육사교장 졸업식사 전문’
근간상황 착잡한 심정·염려하는 눈으로
환상과 착각속 적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싸우지 않고 이기는건 정책결정자들 일

‘육사졸업식에서 있었던 일’의 주인공 민병돈 중장 누구인가?
사단장·특전사령관 거친 학자형
“정치엔 관심없지만 소신 뚜렷” 평
본인 해명 않고 식사공개도 거부
(한국일보, 1989년 3월 25일자)

민병돈 육사교장 졸업식사 전문
최근 사태에 착잡한 심정···일부는 매우 염려
환상 착각 속 적이 누구인지도 흐려지고
평화통일 외칠 때일수록 군인은 냉철해야

민병돈 중장은 누구인가?
육사 15기 서독서 독문학 전공한 지성적 군인
특전사령관 등 지내 무인기질 남다르다는 평
(동아일보, 1989년 3월 25일자)

다음은 민병돈 교장 졸업식사 전문.

존경하는 대통령각하 내외분, 내빈 및 학부모 여러분, 교수 훈육관 및 교직원 그리고 자랑스러운 사관생도 여러분! 나는 오늘 육군사관학교의 교수 및 교직원과 재학생을 대표하여 본교 제45기생 여러분의 졸업을 축하합니다.

엄격하고 빈틈없이 짜여진 사관학교 생활 속에서 군사학과정과 대학교육 과정을 함께 이수한다는 것은 실로 초인적인 노력과 극기 없이는 해낼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많은 어려움을 이겨내고 졸업과 임관의 영광을 차지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졸업생 여러분! 여러분은 오늘을 맞이하기까지 제3공화국에서 태어나 제6공화국까지 살아왔습니다.다른 나라의 경우 여러 세기에 걸쳐 이루어졌을 그많은 변화들을 여러분은 불과 20대 초반의 젊은 나이에 몸소 겪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계속해서 국제정치 및 국내정치 상황의 급격한 변화를 보고 있는 중입니다. 특히 우리 정부의 북방정책과 남북한 관계에서 볼 수 있는 일련의 상황들은 국방의 제일선을 담당하고 있는 우리들로 하여금 이러한 변화들을 예의주시하고 국방에 빈틈이 없도록 대비할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가운데 여러분은 근간의 우리나라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련의 사태를 특별히 남다른 눈으로 진지하게 그리고 어느 부분은 착잡한 심정으로 또 어느 부분은 매우 염려하는 눈으로 바라보고 있을 것입니다. 사실 지금 우리사회 일각에서는 가치관의 혼란이 일어나고 환상과 착각 속에서 우리가 지켜야할 가치가 무엇이고 우리의 적이 누구인지조차 흐려지기도 하며 적성국과 우방국이 어느 나라인지도 기억에서 지워버리려는 매우 해괴하고도 위험한 일이 벌어지기도 합니다.

여러분은 오늘 우리사회의 이러한 현상을 보고 또 이러한 현상에 직면한 군의 처지를 보고 어떻게 해서 우리가 이러한 현재를 맞이하게 되었는지 알려고 한다면 그 원인이 된 과거를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앞으로 여러분이 어떠한 미래를 맞이하게 될지 알려고 한다면 현재의 여러분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스스로를 돌아보면 될 것입니다.

이제 곧 여러분은 여러분을 키워준 이곳 육군사관학교를 떠나 각자의 임지에 도착하면 부하를 지휘하게 됩니다. 이제 그것은 더 이상 사관생도로서의 실습이 아니라 한 사람의 장교로서, 책임있는 지휘자로서 실제로 부하를 지휘하고 통솔하는 것입니다.

원래 인간이 인간을 지휘통솔하는 것이 가장 어려운 일입니다. 사람들의 지적 수준이 높아질수록 더욱 그렇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여러분은 점점 어려운 여건하에서 부하를 지휘하고 통솔하게 될 것으로 예상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분은 지휘와 통솔에 성공해야 합니다.

만약 여러분이 지휘통솔에 실패하면 그것은 여러분 개인의 실패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이 소속된 부대의 실패, 군의 실패 그리고 경우에 따라서는 국가적 피해로까지 확대될 수도 있습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장교의 책무, 지휘관의 책임이 막중하다는 것입니다.

민주국가 민주사회에서 장교라는 신분이나 지휘관이라는 직책이 꼭 특별한 사람만이 할 수 있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누구나 다 해낼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하기는 더욱 어렵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국가는 여러분을 장교로 육성하기 위하여 많은 돈을 들여 4년간이나 육사에서 수련하도록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군에 대하여 그리고 국가에 대하여 남달리 큰 의무를 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육사에서는 여러분에게 나라를 지키는 일에 헌신하고 봉사하도록 가르쳤습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여러분이 부하를 잘 통솔하고 강한 훈련과 함께 성공적인 부대지휘로 유사시 여러분에게 부과되는 막중한 임무를 반드시 완수해야만 합니다.

물론 이런 일에는 필연적으로 희생이 따를 것입니다. 자기 자신의 생명은 물론 사랑하는 부하들의 생명까지도 희생시킬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하며 부하들도 여러분을 믿고 명령대로 따르도록 평소부터 교육하고 통솔하며 지휘해야 합니다.

단 하나밖에 없는 생명, 단 한번 사는 인생 그리고 자기 인생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과 그 모든 것에 대한 위대한 포기를 순간적으로 단행해야 하는 일은 누구나 해낼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일시에 닥친 위험앞에 순간적으로 몸을 덮쳐 자기 자신을 죽게 하고 사랑하는 부하들을 살려낸 우리의 고 강재구 소령의 행동을 그렇게도 높이 평가하고 그를 존경하며 그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오래오래 기리기 위하여 이곳 우리 앞에 그의 동상을 세워놓고 매일 바라보며 우리의 사표로 삼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고 강재구 소령의 희생이야말로 살신성인의 표본입니다.

사랑하는 졸업생 여러분! 여러분은 바로 고 강재구 소령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이어받은 육사출신 장교임을 기억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한 사람의 장교로서 겨우 법을 어기지 않고 있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장교의 처신의 기준은 도덕률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실무를 해 가노라면 때때로 학교에서 배운 이론과 실제 사이에 그리고 이상과 현실 사이에 차이가 있음을 느낄 때도 있고 어떤 때는 그 차이가 예상외로 커서 당황할 때도 있을 수 있으며 또 어떤 때는 심리적으로 갈등을 일으키고 고민하거나 고뇌할 때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한 과정에서 여러분은 한 인간으로 한사람의 장교로 그리고 군의 지휘관으로 성숙해가는 것입니다. 간혹 어려운 상황에 처하여 어떤 결정을 내리기 어려울 때는 여러분의 모교 육사 스승으로부터 배운 바를 생각해보고 그래도 해답을 얻지 못하면 여러분의 양심과 양식에 따라 판단하고 결심하여 시행한 후에 스스로 책임을 지면될 것입니다.

장교, 특히 지휘관은 무능하다고 질책받는 것보다 부도덕하다고 지탄받는 것이 훨씬 더 부끄러운 일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제 멀지않아 여러분은 장교가 되기보다 장교노릇 하기가 훨씬 더 어렵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솔선수범하면서 강한 훈련과 정신력으로 반드시 싸워서 이기는 부대를 육성하는데 온 정력을 쏟아야 합니다. 흔히 인용하는 손자병서에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 최선이라고 하는 명구는 전투지휘자를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정책결정자를 위한 것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싸움은 여러분의 영역에, 그리고 싸울 것이냐, 외교로 해결할 것이냐 하는 것을 결정하는 일은 정치인의 영역에 속하는 일입니다. 지금의 상황에서 정치인이 평화통일을 외칠 때일수록 우리 군인은 냉철하게 상황을 판단하고 전쟁에 대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특히 초급장교로서 지금 당장에 생각할 일은 전투준비입니다. 고급장교로 승진하고 장군이 되어 군의 지도자가 되는 것은 훨씬 뒤에 생각해볼 수 있는 일입니다.

사랑하는 제45기 졸업생 여러분!
모든 육사인들이 각 부대에서 활약하게 될 여러분을 지켜보고 격려할 것이며 나도 이 자리에 참석하신 모든 귀빈들과 함께 여러분의 앞날에 성공을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

육사 졸업식장에서 민병돈 장군과 부인 구문자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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