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주년 국군의날⑦] 40년 군생활 나를 이끈 ‘경험’과 ‘멘토’
[아시아엔=김국헌 전 국방부 정책기획관] 우리는 6.25전쟁을 거치지 않은 세대였다. 책으로 배울 수밖에 없다. 김홍일 장군에 대해서는 육군본부 군사연구실에서 장군 평전을 준비하면서 들은 바가 많았다. 시흥지구사령관 비서실장을 지낸 강영훈 장군에게 들은 것도 적지 않다.
일본군 대좌 출신인 김석원 장군은 모교 조회 때마다 훈화를 들었다. 이를 통해 일본군의 면모를 익혔다. 백선엽 장군은 책을 봉정하며 별세하기까지 다섯 번 뵈었다.
이병형 장군은 런던에서 하루 안내하며 그 면모를 절감했다. 이재전 장군은 한국전략문제연구소 토론을 통해 뵈었다. 한신 장군은 육사 교수부에서 진시황의 전설을 들었으며, 야전군사령관 당시 부관이었던 조성태 장관을 통해 들었다. 박창암 장군은 <자유>지를 발간할 때 뵈었다.
육사 28기는 월남전을 거치지 않았다. 국방차관 보좌관으로 있으며 구치터널을 가보았다. 적은 어디에도 있고 어디에도 없었다. 월남전과 아프간전에서 미국과 영국이 왜 패퇴할 수밖에 없었는지 단번에 꿰뚫을 수 있었다. 하이퐁의 전쟁기념관에서, 디엔비엔푸에서 프랑스군이 패퇴하게 된 경과를 생생히 볼 수 있었으며, 독립을 위한 베트남인의 강인한 의지를 읽을 수 있었다.
월맹 국방차관이 “월남은 중국과 천년 숙적”이라고 하며, “월남인들이 손재주가 많고 개를 좋아하는 것이 한국인과 비슷하다”고 하여 같이 웃었다. 베이징에서 중국의 인구와 면적에 관한 상세 자료를 구했다, 옛날로 말하자면 판적(版籍)을 얻은 셈이다.
차관실에 있을 때 태국, 필리핀, 인도네시아를 가보았다. 군부통치의 실상을 보았다. 인도네시아는 섬이 아니라 하나의 대륙이었다,
1965년 공산당의 쿠데타 실패 등으로 인한 장성 피살로 화교 30만이 학살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동남아에서의 화교의 문제점과 한계를 보았다. 안기부에 있을 때 이스라엘에 가서 중동전쟁의 현장과 그리스도교의 유적을 보았다.
소위 때 대대 작전과장이 638 고지전투에서 포병대대 연락장교라 좀 여유가 있어 전투현장을 녹음한 것을 들을 수 있었다. 병사들이 고지를 오르며 죽기로 싸우는 육탄전 현장의 생생한 육성을 들을 수 있었다. 포대장을 하며 대대장이 육사 선배고, 상급부대는 멀리 떨어진 기갑여단이라 RSOP(부대전개훈련)을 임진강변 진지에서 마음대로 할 수 있었다. 155미리 포는 기동부대를 지원하는 105미리 포와 달리 요새를 파괴하는 중포重砲다. 이제는 기동력을 갖춘 155미리 자주포도 대폭 증강되었다. 2010년 북한의 연평도 포격에 대응한 해병대 포가 K-9 자주포였는데 보복이 두려워 더 도발하지 못하게 한 무기였다.
김태영 장관도 포병이기 때문에 화력을 잘 사용한 것이다. 육사 28, 29기에는 유달리 포병출신이 많다. 김태영 장관, 김병관 연합사부사령관이 그들이다.
포대장을 하며 나는 실시와 평가를 아울러 하는 훈련을 했다. 모든 것이 내 기준에 들 때까지 돌렸다. 기갑여단이라 연료는 여유가 있었다. 훈련을 마치고 여섯 대의 포차를 끌고 임진강교를 넘으며 내 위관 야전생활 최고를 만끽했다.
면담과 여행을 통한 직접 경험 말고도 영화 등을 통한 간접 경험도 사료의 중요한 일부분이 된다. <패튼>, <머나 먼 다리>, <콰이강의 다리>등은 나의 에세이 어딘가에 녹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