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주년 국군의날④] 남북 국방장관회담 ‘비망록’

필자 김국헌 육군소장이 김정일 위원장과 악수를 하고 있다. 오른쪽은 조성태 당시 국방부 장관(2000년 6월 15일 평양)

[아시아엔=김국헌 전 국방부 정책기획관, 군비통제관 역임] 북한과 미국의 장성급 회담은 비무장지대를 비행하다 북한군 사격으로 격추되어 북한에 잡힌 헬기 조종사 홀 준위 사건 이후 파행으로 군사정전회담(MAC) 대신 이루어진 것이다. 리언 라포트 한미연합사령관은 여기에 관한 협상 권한을 한국 국방부에 위임한다는 서한을 보내왔다. 지금까지 유엔사와 북한이 해결하던 정전협정에 관한 사건을 우리가 북한과 회담할 자격이 생긴 것이다. 북한과 회담을 위한 협약참석자, 사용언어 등에 관한 실무협약으로 절차가 이루어졌다.

이에 따라 북미장성급회담이 개최되었다. 미국측의 실무자로 나의 상대는 연합사 부참모장이었다. 참모장은 유엔사 참모장, 연합사 참모장, 주한 미군사 참모장을 겸하고 있어 내 상대는 주로 부참모장이 되었다. 주로 솔리건 소장을 상대했는데 전임 던 장군과 달리 무척 까다로운 성격으로 미군들 사이에도 소문난 장군이었다.

나는 회담 진행상황을 부참모장에 상세히 알려주었다. 우방 상호간에도 신뢰관계가 중요하다. 미군측과 자리를 같이 하면서 나는 먼저 “로마 교황이 그리스도의 지상 대리자, 바티칸 시국(市國)의 수장, 로마 대주교의 삼중 직분을 수행하기 때문에 삼중관을 쓴다”는 것을 소개하며 유엔사 참모들의 수고를 안다고 하면서 대화를 이어 나갔다.

이러한 과정을 듣게 된 한미연합군사령관 라포트 장군이 나에게 감사서한을 보내왔다. 미군 대장이 한국군 소장에 감사서한을 보낸 것은 드문 일이다. 편지에는 “Republic of Korea will continue to enjoy a relationship because of the outstanding dedication of such as you”라는 문구가 들어 있다. 큰 영광이고 고마운 일이었다.

조성태 국방부 장관이 2000년 9월 남북 국방장관 회의에서 북의 김일철 인민무력부장과 건배하고 있다

2000년 6월 남북정상회담에 이어 9월 남북 국방장관회담이 열렸다. 북한에서는 김일철 인민무력부장, 우리는 조성태 국방장관이 참가했다. 회의는 서울과 평양이 아닌 제3의 장소로 제주도에서 열렸다. 나는 공군기지가 있는 서울 공항을 주장했다. 회담을 주관하고 있는 안기부에서는 김포공항을 제기했었다.

김일철 인민무력부장이 수석대표, 우리는 김희상 국방장관 특보(국방대학원장)가 수석대표였다. 중장인 김희상 장군이 차수 김일철 부장을 맞는 의전이 문제였다. 둘은 서로 경례를 하지 않고 악수만 하였다, 그러나 김일철 무력부장이 김대중 대통령을 만날 때는 거수경례를 올렸다. 나는 회담 전 식사 자리에서 “지금까지 수많은 회담과 달리 통역을 쓰지 않으니 편리하다”고 하여 역사적 의의를 강조했다.

사상 첫 남북국방장관회담이 2000년 9월 열렸다. 군사분계선을 넘은 김일철 북한 인민무력부장을 환영나온 김희상 국방장관특보가 맞이 하며 악수를 나누고 있다. 

북한 실무대표는 유영철 대좌였다. 그는 모스크바 주재 무관을 경험했다. 나는 레닌 묘를 가봤느냐고 물었다. 러시아 사람들이 레닌 시신을 방부 처리 하느라 고생이 많다면서 김일성 시신을 계속 모시고 있는 북한을 넌지시 짚었다. ‘탁상 위에서의 전쟁’인 회담에서는 상대에 압도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회담 도중 유영철이 응급처리가 필요한 사고가 났다. 북한의 지원 요청에 따라 유영철을 문산에 후송하여 치료를 받게 해주었다. 북한은 고맙다고 하면서 보안을 신신 당부했다. 우리는 일체 발설하지 않았다. 이제 시간이 많이 흘러 역사 기록 차원에서 공개하는 것이다.

북한과의 회담은 군사정전위(MAC)같이 북한 도발에 대한 유엔사의 항의와 판에 박은 북한측 변명 및 선전과는 달리 순조롭게 진행되어 갔다. 총 23회의 실무협상으로 남북군사실무회담이 타결되었다. 실무대표로 군비차장 김경덕, 장광일, 문성묵 대표 등이 활약했는데 탁월했다. 회담을 위한 기조발언을 관련 부처와 같이 준비하고 논리와 대응을 준비해 나가며 예행연습도 거친다. 그들은 배우, 나는 감독이었다. 감독이 보기에 매우 훌륭한 배우들이었다. 회담진행 상황은 국방부와 함께 청와대, 통일부, 안기부에 전달되었고 나는 전반을 협조, 통제하고 필요한 지시도 받을 수 있었다.

회담을 하면서 북한의 속내를 알기 위해 우리는 북한이 받아들이기 힘든 요구를 했다. 개성에 있는 김일성 찬양 문구가 새겨 있는 영생탑을 제거하라고 요구했는데, 우리 쪽에서 보인다는 이유를 들었다. 실제로는 멀어서 보이지는 않고 통일부에서 개성에 갔을 때 본 것이다. 북한은 이마저도 수용했다. 자신들 카드를 다 내보인 것이다.

몇 차례 회의를 하다가 북한은 2성 장군이 나오라고 했다. 소장이던 나는 개인적으로는 나가고 싶었지만 회담을 통제해야 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나갈 수 없었다. 그 구실로 우리측에서 소장이 나가면 북에서도 별 둘이 나오라고 했다. 북한의 별 둘은 중장이다. 공산권에서는 준장이 없기 때문이다. 결국 북한은 소장이 나오라는 제안을 꺾었다. 작은 것 같지만 회담이 우리 주도로 돌아가는 선례를 만들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장군급 회담은 우리 표현이고 북한은 장령급 회담이라고 한다. 장군은 김정일만이 쓸 수 있기 때문이다. 용어는 각자 편리할 데로 쓴다. 북한이 필요가 있어 회담할 때는 비교적 융통성이 있다. 북한 대표는 일반적으로 논리가 정연하며 말을 잘 한다. 남북회담에 나온 대표들은 군내에서 최고 엘리트급이다.

남북국방장관회담은 한민구 장관 때 한번 더 하고 중단돼 있으며 현재 실무회담도 일체 중단돼 있다. 북한은 2020년 6월 남북연락사무소를 폭파해버렸다. 남북관계를 어떻게 하자는 것인지 딱하기만 하다. 남북대화에 많은 경험을 가진 장성택을 총살시켰다. 남북 모두 남북관계에 오랜 경험을 가진 사람들이 대거 사라졌다. 우리는 군인은 59세 정년이나 북한은 여기에 제약되지 않고 오래 근무할 수 있다. 북한이나 중국은 군인이 최고의 대우를 받는 군국주의 국가이다.

군비통제관으로 근무하면서 관련 업무를 『국군포로문제』, 『북방한계선에 관한 우리의 입장』, 『한미동맹과 주한미군』, 『대량살상무기 문답백과』 『군사문화의 이해』 등의 소책자를 만들어 배포했다. 『한미동맹과 주한미군』은 영문판도 만들어 주한미군에 보냈다. 여기엔 1장 △피로 맺어진 우방 2장 △한미동맹의 역사적 맥락과 법적 근원 3장△한미방위태세 4장 △새로운 동반자 관계 5장 △주한미군의 이모저모 등을 실었다.

필자는 이 가운데 특히 △신념의 승리, 인천상륙작전 △잊혀진 전쟁 6.25 잊지 않기 위하여 △자주국방과 한미역할 조정 △국제평화를 위한 한국의 기여 △한미동맹-21세기 핵심적 동반자 △정보전력, 적을 보는 눈 △주한미군 지위협정 △방위비 분담 문제 △주한미군 숙소 건립 문제 △연합토지 관리계획 △분단의 상징 JSA △주한미군의 한국생활 △KATUSA, 미군 속의 한국군 병사 등은 군인뿐 아니라 일반인이 한국군의 어제와 오늘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으로 본다.

Leave a Reply